[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6. 성경 해석(101~119항)
성경도 아는 만큼 보인다 개는 꽃이 예쁜 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꽃을 꺾어 자신의 집을 장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꽃에서 ‘아름다움’까지 함께 봅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인간 안에 ‘아름다움’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꽃이 있어야 꽃이 보이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아름다움이 보입니다. 내가 엄마가 되어 보아야 엄마가 보이고 아빠가 되어 보아야 아빠가 보입니다. 성경도 지식으로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라 진리를 품은 신앙인이어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과 유다인, 개신교 신자, 그리고 천주교 신자가 각자 성경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해석의 차이는 성경에 대한 지식에서가 아니라 각자가 지닌 교리의 차이에서 발생합니다. 아는 만큼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과 믿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문자적인 정보만 받아들이는데 이것을 성경의 ‘자구적(문자적) 해석’이라 합니다.(116항 참조) 자구적 해석을 하지 않고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기는 어렵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성경이 구원의 책이 되지는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만 사랑하셔서 이집트 군대를 홍해에 다 수장시키고 이스라엘 백성만 건너게 하신 사실이 우리 구원에 도움을 주지는 않습니다. 바오로도 (구약)성경을 외우다시피 한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였습니다. 성경을 문자로만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모든 쓰여진 것은 그 글을 쓴 사람만이 가장 완벽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유일한 저자도 성령님이시고 유일한 해석자도 성령님입니다.(109~111항 참조) 그러니 인간은 성령의 도움으로만 성경의 의미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으면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생기고 그러면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해석하게 됩니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책이고 그리스도께서도 구원하러 오신 분입니다. 이때부터 ‘영성적 의미’(117항 참조)의 성경해석이 시작됩니다. 모든 성경구절을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빛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도중 빛 가운데서 그리스도를 만나 새로운 믿음이 생겼습니다. 영성적 해석의 첫 단계가 ‘우의적 해석’인데, 바오로 사도는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의 상징’으로 보았습니다.(1코린 10,1-2)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는 것을 ‘세례’로 알게 되었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오로 사도는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날 때, “(그러면) 주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2,10)라고 물었습니다. 성경 해석이 행위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면 현학적 교만만 증가시키는 해악을 끼칩니다. 예수님은 바오로를 교회에 보내어 세례를 받게 합니다. 영성적 해석의 두 번째 단계는 우의적 해석으로 알게 된 진리를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도덕적(윤리적) 해석’(117항 참조)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마지막 단계인 ‘신비적 해석’(117항 참조)은 그 행위가 어떻게 구원에 이르게 하는지를 이해하게 합니다. 각 종파마다 믿는 구원의 교리가 다르기에 여기에서 해석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가톨릭교회는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을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지상교회로 보고 그들이 세운 예루살렘을 천상교회로 해석합니다. 교회는 광야에서 성체로 상징되는 만나와 성령으로 상징되는 바위에서 흘러나온 물로 힘을 얻으며 지상 순례의 여정을 한 목자 밑에서 하게 됩니다.(1코린 10,1-4 참조) 천주교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끈 것처럼 베드로의 후계자인 한 교황의 이끎을 따라 구원의 땅인 가나안에 이르게 된다고 믿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성령강림으로 체득한 구원의 진리인 ‘성전’(聖傳·거룩한 전승)을 성경해석의 기준으로 사용합니다. 개신교는 성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수많은 다른 성경해석이 나오고 그렇게 수많은 종파로 나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는 만큼 알게 되고 아는 만큼 보이게 됩니다. 교회가 받은 성령은 또한 교회의 믿음이기에 가톨릭교회가 믿고 가르치는 신앙과 교리는 하나일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하나인 성경해석밖에 나올 수 없습니다.(114항 참조) [가톨릭신문, 2019년 2월 3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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