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9. 저는 믿나이다(144~149항)
자신을 ‘하느님’이라 믿으면 의인이 된다 하느님께서 “너는 누구냐?”라고 물으실 때 “저는 하느님입니다”라고 대답하면 하느님이 기분나빠하실까요? “저는 인간입니다”라고 할 때 더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한갓 사람이면서 하느님 행세를 한다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율법서에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고 한 구절을 인용하시며 당신이 하느님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하십니다.(요한 10,33-34) 구약의 야곱은 형 에사우의 권리를 가로채기 위해 아버지 이사악 앞에서 에사우라고 주장했습니다.(창세 27,19 참조) 우리의 어머니인 교회도 레베카가 야곱에게 시켰던 것처럼 우리가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라 고백하라고 권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도 인간이라 믿으면 하늘나라의 상속권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내가 하느님이라고 여기는 것은 교만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교만입니다. 만약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나는 하느님이다’라는 믿음을 가졌다면 선악과를 먹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뱀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느님처럼 된다고 유혹했는데,(창세 3,5 참조) 이미 하느님이기에 굳이 선악과를 먹어 하느님처럼 될 필요가 없겠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내가 하느님이라 믿으면 죄를 짓지 않게 되고 내가 하느님이라 믿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던 한 새끼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개보다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엄마 호랑이에게 “엄마, 나 강아지만도 못한데 정말 호랑이 맞아?”라고 물었습니다. 엄마 호랑이가 몇 번이나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새끼 호랑이는 같은 질문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화가 난 엄마 호랑이가 마침내 “그래, 넌 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하느님임을 의심하는 것도 주님 앞에서 이 새끼 호랑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러 오신 유일한 진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이는 하느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라 믿어야 하느님처럼 살 수 있습니다. 내가 늑대에게 키워져 늑대라고 믿으면 늑대처럼 삽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키워져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처럼 살고 하느님에게 키워져 하느님이라 믿으면 하느님처럼 삽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에게 키워진 당신 자녀들만이 살 수 있는 곳입니다. 다만 내가 하느님이라 믿기를 원치 않는 것은 겸손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처럼 변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계속 인간으로서 짓는 죄와 세상 것에 대한 애착을 즐기고 싶어서 내가 하느님임을 믿으려하지 않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싶다면 우리 모습이 아무리 아닌 것 같아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당신 자녀로 삼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아기가 네 발로 걷는 삶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부모의 사랑을 믿어 자신이 부모처럼 사람임을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고 믿으면 두 발로 걷는 연습은 하지 않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이 인간이라 믿으면 하느님을 본받을 수 없습니다. 교리서에서 이 같은 믿음의 모범으로 ‘두 인물’을 제시합니다. 구약에서는 “믿는 모든 사람의 아버지”(로마 4,11.18)가 된 ‘아브라함’(145~147항 참조)을, 신약에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신 ‘성모 마리아’(148~149항 참조)를 그 믿음의 모델로 제시합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당신이 세우실 백성의 아버지가 되게 만들겠다고 그를 새로운 땅으로 보내십니다. 만약 “양떼를 치는 주제에 제가 어떻게 하느님 백성의 아버지가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면 그는 하느님 백성의 성조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모 마리아도 ‘하느님의 어머니’가 되신다는 천사의 말을 믿으셨습니다. 즈카르야가 “저는 늙은이고 제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라고 한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기도를 드릴 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면서 ‘내 주제에 무슨!’이라는 생각이 든다면 성모님처럼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들보다 늘 더 잘 되기만을 원합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 않으실 리가 없습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3월 3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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