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0. 올바로 알고 믿는 것(「가톨릭 교회 교리서」 150~153항)
내가 믿는 분 제대로 아는지를 알아보는 세 가지 방법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은 대사제 아론에게 자신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을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아론은 금으로 수송아지 상을 만들고 “이스라엘아, 이분이 너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너의 신이시다”(탈출 32,4)라고 선포합니다. 어쩌면 우리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만든 헛된 것을 섬기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이에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1티모 1,12)라고 말합니다. 우리 또한 삼위일체 하느님을 믿고는 있지만 ‘제대로 알고 믿는지’ 살펴야합니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세상 것에 의지하면 잘못 알고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으면 자녀인 우리는 “자신을 하느님께 전적으로 맡겨야”(150항)합니다. 아이가 부모를 두고 돈에 의지한다면 부모를 온전히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으면 돈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세상 모든 것들을 다시 창조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피조물에 두어서는 안 됩니다.(150항 참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올바르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까요? 옛날에 두 가난한 농부가 있었습니다. 두 농부는 무 농사를 지었고 모두 좋은 무를 생산했습니다. 한 농부는 이 모든 것이 원님 덕분이라며 가장 큰 무 하나를 원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나 다른 농부는 그 무가 원님에게 무슨 가치가 있겠느냐며 아무 것도 바치지 않았습니다. 큰 무를 선물로 받은 원님은 감동하여 그 농부에게만 답례로 황소 한 마리를 주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겐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리고 인정받기 위해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좋은 것을 선물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이웃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내가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웃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선물은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모 마리아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엘리사벳에게 갔습니다. 그리스도보다 더 귀한 선물은 없습니다. 이웃에게 그리스도를 전해주고 있다면 그 사람은 그리스도의 가치를 아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옳게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이웃에게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마치 원님에게 무를 바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농부와 같습니다. 선교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올바로 알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알게 하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152항 참조)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다’ 할 수 없기”(1코린 12,3)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아야 그리스도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를 알게 되어야 하느님 아버지까지 알게 됩니다. 성령께서 이런 일을 하시기에 성령님을 올바로 알고 믿는다면 성령을 받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청하는 무엇이나 다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특별히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을 청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루카 11,13 참조) 성령께서 우리가 청해야 할 가장 귀한 하느님의 선물임을 안다면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게을리 할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이렇게 기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분이심에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성령을 올바로 믿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금송아지로 만들지 않기 위해 이 세 가지를 살펴야합니다. 첫째는 ‘내가 세상 것에서 자유로운가?’입니다. 세상 것에 집착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겨 걱정근심하지 않는다면 하느님을 올바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와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입니다. 내가 믿는 복음의 가치를 올바로 안다면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성령을 받기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는가?’입니다. 다른 무엇보다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주시는 성령님을 청하고 있다면 올바로 알고 믿는 것입니다.(갈라 5,22 참조) 이렇게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나는 내가 누구를 믿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2티모 1,12)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3월 10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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