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6. 하느님은 진리요 사랑(「가톨릭 교회 교리서」 214~221항)
하느님의 완전함 알면 나의 불완전함도 알게 된다 모든 명품들에는 항상 가짜가 존재합니다. 가짜는 진품이 나타날 때 가짜임이 드러납니다. 전문가들은 먼저 진품만이 가지는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점들을 찾아내어 그것들이 없는 가짜들을 가려냅니다. 세계에 수많은 피에타 상들이 존재하지만 바티칸 성베드로대성당에 있는 진품과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조각가는 질투심에 불타 피에타 상의 성모님 코와 손가락을 망치로 손상시켰습니다. 미켈란젤로 앞에서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인간도 자신을 알려면 진품이신 하느님을 만나야합니다. 우리가 창조자 하느님을 만나면 그분 아니면 존재할 수도 없었던 우리 자신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하느님만이 가진 능력 중 하나가 ‘존재하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어떤 피조물도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할 수 없습니다. 오직 “있는 자”(I AM)만이 없던 것을 있게 하실 수 있습니다. 모래 위에 떨어진 스마트폰이 저절로 생겨났다고 우기는 사람이 아닌 이상, 존재하지조차 않았던 우리를 엄청나게 정교하게 만들어내신 하느님의 능력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무언가를 존재하게 해주시는 하느님은 존재하실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200항 참조) 인간이 하느님을 만나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랑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사랑은 행복입니다. 사랑만큼 인간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버드대학에서 1938년부터 당시 남자 재학생 268명을 대상으로 2500만 달러의 거액을 들여가며 그들의 삶의 질을 추적하여 기록 조사하는 연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966년부터 이 연구의 책임자였던 조지 베일런트 박사가 75년간의 연구 결과를 「행복의 비밀」이란 책으로 출판하였습니다. 저자는 긴 결론을 대신하여 “행복은 사랑이다. 이상 끝”(Happiness is Love. Full stop)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사랑이십니다.(1요한 4,8.16 참조) 하느님이 ‘사랑’이시라면 인간은 사랑이 아니어야합니다.(221항: “하느님은 존재 자체가 사랑이신 것이다.”) 마치 자동차가 자신을 만든 인간에게서 연료를 부여받지 않으면 움직일 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는 자신이 하느님이라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거저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218항 참조) 그렇다면 인간의 행복 또한 주님이 아니면 스스로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은 또한 하느님께서 알려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하느님께서 진리를 넣어주시지 않으면 인간은 진리를 스스로의 힘으로는 깨칠 수 없습니다. 말을 알아들으려면 그 말뜻이 이미 자신 안에 들어있어야 합니다. 언어의 뜻을 모르면 아무 말도 못 알아듣습니다. 자녀에게 부모가 언어를 알려주듯, 참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인간이 배워야하는 진리는 하느님만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이시고(요한 14,6 참조) 악마는 ‘거짓’이라고(요한 8,44 참조) 규정하십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가 자신의 생각을 말할 때 ‘사탄’이라고 하십니다.(마르 8,33 참조) 인간 스스로의 생각도 하느님 앞에서는 거짓인 것입니다. 참 진리는 하느님 한분뿐이십니다.(215~217항 참조) 이렇게 하느님께서 존재자체이시고 사랑자체이시고 진리자체이심을 알게 되면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스스로의 힘으로는 사랑도 할 수 없으며 참 진리도 깨달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지 않으면 아무 것도 소유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계시를 통해 우리 안에 부여되듯, 사랑도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집니다.(로마 5,5 참조) 따라서 하느님을 알아갈수록 인간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고 주님께 의탁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에 기도로 하느님께 끊임없이 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아직 하느님도 자신도 무엇인지 모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4월 2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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