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3. 창조(「가톨릭 교회 교리서」 290~295항)
행복하면 창조하고, 창조하면 행복하다 프랑스 혁명 당시 어떤 어머니가 세 아들과 함께 집에서 쫓겨나 며칠 동안 산속과 들판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무뿌리와 풀잎을 먹고 연명했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군인들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덩굴 속에 숨어 있었습니다. 높은 계급의 군인이 부하에게 덩굴 속에 인기척이 있으니 확인해보라고 하였습니다. 한참 후에 어머니와 아이들이 끌려나왔습니다. 군인은 그들이 굶어 죽기 직전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빵 한 덩어리를 어머니에게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빵을 얼른 받아 세 조각으로 나누더니 아이들에게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것을 본 군인이 혼잣말을 하듯 말했습니다. “자신은 안 먹고 아이들에게만 주는구나!” 옆에 있던 사병이 말했습니다. “아마 배가 안 고픈가 보죠.” 그러자 상사가 말했습니다. “아니다. 어머니라서 그렇지.” 부모는 왜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자녀들을 낳고 키우는 것일까요?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자신의 행복’을 지향합니다. 부모는 행복하기 위해 자녀를 낳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희생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는 행위 같지만 실제로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여 자녀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부모의 행복인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행복하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곧 궁극적인 부활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었음과 같습니다. 자신의 행복을 포기하여 자녀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곧 행복이기 위해서는 그 희생이 ‘사랑’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왜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셔서 저리 고생하시지?’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심을 모르기 때문에 그리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행복을 돌보시는 궁극적 이유는 바로 당신의 행복을 위하심이었습니다. 사랑은 죽음과 부활을 통한 궁극적 자기 행복을 추구합니다. 신학에서는 이를 ‘영광’이란 단어로 설명합니다. 영광이 곧 행복입니다. 누군가에게 영광을 받으면 행복해집니다. 교리서는 창조를 이야기하며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심”과 “우리의 행복을 돌보심”이 별개가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당신 선하심을 드러내고 나누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이며, 이를 위하여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294항) 결국 하느님의 영광은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부모의 행복이 자녀에게 있는 것과 같습니다. 창조자의 피조물에 대한 희생 뒤에는 더 큰 행복에 대한 희망이 존재합니다. 이 사랑의 열쇠가 만물을 창조할 손을 열었습니다.(293항 참조) 하느님은 “당신의 두 손”이신 “성자와 성령을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는 당신 영광을 위한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동업적입니다.(292항 참조) 이는 자녀 탄생이 두 남녀와 사랑의 공동 합작품인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또한 자녀를 보면 그 부모가 보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을 포함한 이 세상 피조물을 보면 창조자 삼위일체 하느님이 보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첫 원인이시므로, 당신의 피조물 안에 가장 깊숙이 현존하시기 때문입니다.”(300항 참조) 성경은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신 분, 그 자비 당신의 모든 조물 위에 미치네.”(시편 145[144],9)라고 말하며 찾고자만 하면 어디서나 주님의 현존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시편 저자는 “주님, 당신의 업적들이 얼마나 많습니까!”(시편 104[103],24)라고 말하며 주님께서 당신을 감추실 리 없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내어주시고 우리는 그 영광의 빵을 먹으며 창조자를 만나고 그의 품에서 진정한 행복과 생명을 얻습니다.(294항 참조) 우리나라 출산율은 세계 최하위입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가 큽니다. 그러나 자녀의 탄생은 부모의 행복과 직결됩니다. 결국 하느님처럼 자녀를 창조함이 곧 처음엔 더 고통스러워지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궁극적인 더 큰 영광의 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창조하는 것이 더 큰 영광의 길임을 하느님께서 창조의 신비를 통해 알려주셨습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6월 9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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