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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소곤소곤 교리: 최후의 심판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6-17 조회수2,537 추천수1

[소곤소곤 교리] 최후의 심판

 

 

현대 사회의 심판

 

“예전에 ‘함부로 살아서 벌 받을까 봐 겁난다.’는 말을 자주 하던 이가 있습니다. 그이가 요즘은 ‘나처럼 못된 놈이 이렇게 부자로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면 하느님은 없다.’라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강한 거부감이 들어 뭐라고 말해 주고 싶은데, 어렵습니다.”

 

답답하시겠습니다. 그 심정은 충분히 헤아려집니다. 물론 그가 불행해지는 걸 원하지는 않을 테지만, 적어도 그렇게 떵떵거리며 하느님까지 들먹이는 모습은 심히 민망할 테지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일면에 마음이 불편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선을 선택해야 함을 알면서도 눈앞의 이익에 무너지고 악에 눈을 감으며, 오로지 눈앞의 물질의 복에만 연연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니까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정의를 이루지 못하는 하느님을 의심하고, 없는 존재로 여겨 버리는 세상과 맞설 수밖에 없습니다. “저 나쁜 사람은 벌받아야 옳다.”라거나 “저런 사람을 왜 가만히 두느냐?”라는 원망을 거부함으로써 세상과 차별화됩니다. 나아가 자신이 정의를 확립할 수 있는 힘의 용사인 양 편을 가르면서 판단하는 일을 삼갑니다. 인간은 스스로 정의를 이룰 능력이 없으며 결코 인간의 노력만으로 정의는 실현되지 않는다는 지혜를 가진 덕분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정의를 이루어야 한다면 세상에 희망은 사라집니다.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세상은 희망이 없습니다(에페 2,12 참조). 무서운 핵폭탄을 만들어 냈지만 그 핵을 통제할 힘을 지니지 못한 것이 인간의 한계이지요.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완전한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희망은 오직 최후의 심판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은 희망의 자리

 

오늘날, 최후의 심판을 강조한 교회의 전통이 많이 희석된 것은 사실이지만 심판의 전망은 그리스도인에게 현재의 삶을 바로잡는 기준임에 변함이 없습니다. 때로는 양심의 소리로, 때로는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희망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고 있으니까요. 땅에서의 고통은 모두 ‘사라지고’ 모든 것이 반듯하게 자리하는 보상이 따를 것이라는 최후의 심판에 대한 믿음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육신의 부활은 꼭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988-1004항 참조). 하느님의 정의 또한 분명히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040항 참조).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은 믿는 이에게 두려운 상황이 아니라 기쁘게 감사하는 희망의 자리입니다. 땅에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했지만 부족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고의 선물입니다. 그날 그 자리에서 우리의 거짓된 모든 것은 무너지고 참됨만이 남을 것입니다. 그날 우리 모두는 병들었던 자신의 삶을 뚜렷이 마주하며 애통해할 것입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오직 믿음으로 얻은 구원에 기뻐 뛰며 환호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정의이고 은총이기에 믿는 이의 위로이고 희망입니다. 곧 하느님의 심판이 그리스도인에게 정의이며 과분한 은총이며 믿음의 굳센 뿌리입니다. 마지막 날 모든 것을 바로잡는 하느님의 보상이 있을 것을 믿는 마음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희망의 요소임을 잊지 맙시다.

 

물론 최후의 심판은 스스로의 삶에 책임을 일깨우는 두려운 자리입니다. 맞는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이 정의에만 근거한다면 인간은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두려움은 사랑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두려움은 하느님을 향한 경외심이기 때문입니다(성 힐라리오, 「시편 강해」, 127,1-3, CSEL 22, 628-630 참조). 하느님께서는 정의이시며 당신의 정의를 당신의 방법으로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끝까지 이끌어 주시는 하느님

 

우리가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필리 2,12) 스스로의 구원을 위하여 힘써야 하는 이유는, 은총이 정의를 배제하지 않지만 그릇된 것을 옳게 만들어 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곧 우리 삶의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어느 죄인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끝까지 온전한 사람으로 설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이 불공정한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한껏 보듬어 주며 기다려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지금 현재’를 함부로 살더라도 ‘지금 당장’ 벌을 주지 않는 하느님이시기에 사랑이십니다. 이 철저한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기에 우리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딱 하나, ‘전능하지 못하신’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려는 당신의 계획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마저도 존중하여 수용하시는 절대적 사랑의 하느님이시라는 진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어 인간이 감히 감지할 수 없는 방법으로 당신의 정의를 이루십니다.

 

이제는 지인의 말 속에서 진리의 목마름을 느끼고 하느님에 대한 메마른 호소를 듣기 바랍니다. 때문에 “나처럼 못된 놈이 이렇게 부자로 떵떵거리며 사는 걸 보면 하느님은 없다.”라는 지인의 고백이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계신다.”라는 확신으로 바뀔 수 있도록 기도해 주기 바랍니다. 자신의 변화에 겁을 먹은 그 심정을 헤아려 거부감이 아닌 연민으로 대하기 바랍니다. 진리에 목마른 이에게 마르지 않는 생수를 전달하는 마음으로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 참조)이신 주님의 살아계심과 꼭 만날 것이라는 진리를 진솔히 들려주기 바랍니다. 부디 하느님 자녀로서 긍지를 지니고 복음의 행복을 당당히 전하여 예수 성심께 기쁨을 선물하시길 청합니다.

 

* 장재봉 스테파노 - 부산교구 선교사목국장으로 지낸 4년을 주님의 ‘개인 지도’ 기간이었다고 믿는다. 그 배움을 본당 사목에 실천하고자 ‘하느님의 눈’, ‘성모님의 눈’, ‘신자들의 눈’, ‘가난한 이웃의 눈’으로 월평본당을 꾸리려 애쓰는 주임 신부다.

 

[경향잡지, 2019년 6월호, 장재봉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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