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30. 육체와 영혼으로 하나인 존재(「가톨릭 교회 교리서」 362~368항)
영혼이 육체를 통제할 수 있을 때 주님의 참 자녀된다 한 부자가 죽을 날이 가까워오자 외아들에게 유산을 물려주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외아들은 자신의 손으로 돈을 벌어본 적이 없는 그야말로 철부지였습니다. 그에게 유산을 주었다가는 금세 탕진해버릴 것이 뻔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불러놓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한 달 동안만 네 손으로 일해서 돈을 벌어오면 내 유산을 모두 너에게 주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할 것이다.” 철부지 아들은 한 달 동안 놀다가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해서 아버지에게 자신이 벌어온 것이라 거짓말을 하며 내어놓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난롯불에 집어던졌습니다. 그러고는 다시 벌어오라고 했습니다. 아들은 깜짝 놀랐지만 변하지 않았습니다. 다음 달에도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하여 아버지에게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또 그 돈도 난롯불에 던졌습니다.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결국 아들은 안 되겠다 싶어 정말 몸이 부서져라 일을 하여 처음으로 벌어본 돈을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아버지는 그 돈을 난롯불에 던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소리를 지르며 곧바로 불에 타고 있는 돈을 맨손으로 끄집어내었습니다. 반쯤 타버린 돈을 바라보며 아들은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이제야 내 재산을 물려줄 수 있겠구나!” 아버지가 주려고 하는 유산의 가치가 어떤 것인지 깨닫게 되었을 때, 아들은 아버지에게 순종하여 그 재산을 잘 관리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은총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될 때만 하느님께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은총은 ‘성령’입니다. 성령은 순종의 그릇에 담깁니다. 아담과 하와는 불순종함으로 성령의 은총을 잃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세례 때 성령을 받으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따라 나를 통제할 수 없다면 주님의 성령은 내 안에서 소진되고 맙니다. 주님의 은총의 가치를 안다면 그 은총을 지키기 위해 나를 죽일 수밖에 없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이기 때문에 성령의 ‘불’을 끄지 않기 위해서는 ‘물’과 같은 육체의 욕망을 빼버려야 합니다. 인간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육체는 꼭 영혼에게 순종하지만은 않습니다. 영혼은 머리와 같아서 명령을 내립니다. 머리가 음식을 그만 먹으라고 명령을 내려도 몸은 과식을 하고, 그만 마시라고 해도 과음을 하며, 그만 자라고 해도 일어나려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육체가 영혼(머리)의 명령을 따라주지 않는 이유는 ‘마음’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마음이 작동하게 하는 힘이 ‘영’(靈)의 역할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으셨다면 아버지께 순종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 육체도 영혼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마음을 발동시킬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인간을 “영과 (영)혼과 몸”(1테살 5,23)으로 나눕니다. 영은 영혼과 구분됩니다.(367항 참조) 인간의 영과 가장 가까운 말은 마음, 혹은 심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368항 참조) 자동차로 비유하자면, 자동차는 몸이고 운전자는 영혼이며 엔진은 영(마음)입니다. 그런데 자동차의 엔진에 ‘연료’가 주입되지 않으면 운전자와 차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운전자가 아무리 움직이려 해도 연료가 없는 차는 움직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가 영혼을 따라주지 않을 때, 성령의 연료가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성령이 육체의 욕구를 절제하게 만드는 힘입니다.(갈라 5,23) 성령을 통하여 영혼이 육체를 온전히 통제하는 법을 익히게 될 때 인간은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됩니다. 잃었던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성령의 힘으로 아드님을 순종시키셨듯이, 인간도 성령의 힘으로 육체를 통제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렇듯 자신 안에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지닙니다.(362-365항 참조) 죄란 이 삼위일체 모습을 잃고 육체의 뜻대로 끌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육체의 욕구를 성령의 힘으로 통제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는 주님의 참 자녀로 살게 됩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7월 28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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