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교리서 DOCTR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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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가장 큰 계명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09-01 조회수3,031 추천수1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48) 가장 큰 계명 ①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7)

 

 

성사(聖事)를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체험하게 된 신자들은 매우 자연스럽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생각하는 마음과 인간이 하느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를 향하고 있고, 관계 안에서 성장하고 완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처럼 살게 되었으니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된 것이 분명합니다.”(1요한 4,16~17)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십계명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우리가 지켜야 할 도리가 무엇인지를 잘 알려 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첫 세 개의 계명은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충실하고 성실한 사랑의 태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계명”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져 있어서 자칫 사랑의 자유가 배제된 강제적이고 강압적인 규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히려 그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응답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은 진실한 사랑으로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라는 요청과 의무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위해서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보다 하느님을 사랑할 것을 우리에게 명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093항)

 

그러나 사랑의 고귀함을 훼손시키고, 사랑의 관계를 아프게 하는 것은 그 사랑에 대한 망각과 배신의 행위입니다. 그것은 큰 범죄 행위가 아니더라도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작은 일들 또한 조심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호기심이나 재미 삼아서라도 점(占)을 보거나, 손금 또는 사주에 대한 해석에 매달리는 것은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해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116항)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로서의 삶은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포기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을 지키며 살아가야만 하는, 힘겹고 고생스러운 삶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지켜내고 그 사랑 안에 끊임없이 머무는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듯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물러 있게 될 것이다.”(요한 15,10) [2019년 9월 1일 연중 제22주일(피조물 보호를 위한 기도의 날)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49) 가장 큰 계명 ②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십계명의 첫 세 개의 계명이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충실하고 성실한 사랑의 태도에 대한 내용이라면, 네 번째 계명부터 이어지는 나머지 계명들의 내용은 ‘이웃’ 곧, 나와 함께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는 다른 이들을 위한 세심하면서도 적극적인 사랑의 태도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하신 예수님의 ‘사랑의 당부’는 곧, 사랑은 자신 안에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누군가를 향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열매는 기쁨과 평화와 자비이며, 사랑은 친절과 우정 어린 충고를 요구합니다. 사랑은 호의이며, 사랑은 상호 유대를 촉진하고 욕심이 없고 너그럽습니다. 사랑은 우정이며 친교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829항)

 

혼자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주어진 존재의 이유이며 목적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뜻을 지켜내며 이웃들과 화목하게 어울려 지내는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그것은 분명 고민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쓰는 것과 다른 이를 사랑하고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해 나의 것을 양보하는 것 사이에서 어떠한 것이 “옳은 것”인지를 판단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고민의 중심에 항상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가장 큰 사회적 계명입니다. 사랑은 타인과 타인의 권리를 존중합니다. 사랑은 정의의 실천을 요구하고, 또 사랑만이 우리가 정의를 실천할 수 있게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889항)

 

다른 이들을 사랑하며 살아가기 위한 고민과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나 자신의 이익과 나 자신만의 구원을 위해 사랑을 나누기 위한 고민과 노력들을 멈춰버리면, 결국 스스로 ‘무관심’이라고 하는 덫에 걸려, 사랑받을 기회도 사랑을 나눌 기회도 구원을 얻을 기회도 잃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가정공동체 안에서, 사회·정치공동체 안에서, 국가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의 고통을 보듬어 주며, 때로는 기쁜 마음으로 희생하고 양보할 수 있을 때, “나”와 “우리”는 “함께” 행복할 수 있으며,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2019년 9월 8일 연중 제23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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