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2) 교회 ① “그분은 또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십니다.”(콜로 1,18) “교회(라틴어 Ecclesia는 그리스어 ek-kalein ‘밖으로 부르다’에서 나옴)라는 말은 ‘불러모음’을 뜻합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인 성격을 지닌 백성의 집회를 가리킵니다. (…)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극변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백성을 교회로 ‘불러모으십니다.’ Church(영어), kirche(독일어)의 어원인 그리스어 Kyriake는 ‘주님께 속한 모임’을 의미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51항) 교회라는 용어의 어원에서 드러나 있듯이 교회는 하느님께서 “불러모으신” 공동체입니다.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오늘날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는 신앙생활이 개인의 기호에 따라 ‘선택’ 가능한 취미나 동아리 집단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교회는 그 본질상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마음먹으신 그때부터 온전히 하느님의 뜻에 따라 준비된 것입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은 교회를 위해 창조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도록 세상을 창조하셨으며, 이 참여는 그리스도 안으로 사람들을 ‘불러모음’으로써 실현되는데, 이 ‘불러모음’이 바로 교회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60항) 따라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은 매우 분명합니다. 교회는 그 기원에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세상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불러모음”의 역사는 인간의 죄와 불순종으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역경을 겪기도 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세상 구원에 대한 의지를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십자가 죽음으로 교회의 신비를 세상에 더욱 분명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교회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풍요로운 성사(聖事)들을 비롯하여 세상의 여러 현상과 문제들에 대한 신앙적 해석과 가르침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일치와 조화를 위해 애쓰면서 구원의 신비를 알리고 전하는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주어진 사명을 수행하는 힘의 원천과 중심에는 하느님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드러내 보이신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성장하도록 돌보아 주십니다. 우리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향해 자라도록 하시기 위하여 당신 몸인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선물들과 서로 다른 봉사직을 주심으로써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에서 서로 돕도록 하십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794항) [2019년 9월 29일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3) 교회 ② “일어나 비추어라.” (이사 60,1)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구원 의지에 따라 세워진 이 땅의 교회는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선교(宣敎) 사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선교’는 단순히 종교를 홍보하는 정도의 의미만을 담고 있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내리신 선교 명령의 궁극 원천은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영원한 사랑입니다. 순례하는 교회는 그 본성상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앎으로써 구원되기를 바라십니다. 구원은 진리 안에 있습니다. (…) 이 진리를 위임받은 교회는 그들에게 진리를 전달해주기 위해 그들의 희망을 맞으러 나아가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구원 계획이 보편되다고 믿기 때문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50-851항) 따라서 오늘날의 교회 또한 우두커니 서서 찾아오는 사람만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불러모으신” 공동체로서 그 “불러모음” 즉, 선교의 사명을 성실하게 수행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교의 의미를 단순히 교세(敎勢) 확장을 위한 교회 홍보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은 지역 또는 종파에 속한 개별교회들 사이의 그릇된 경쟁의식을 부추기는 것일 뿐, 그것이 예수님께서 맡겨주신 복음(福音)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기쁜 소식, 곧 복음(福音)에 대한 확신과 기쁨을 드러내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해 교회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권력도 재물도 아닙니다. 규모가 크고 재정이 풍족한 교회를 많이 세우는 것이 자랑거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말씀의 가치와 기쁨을 간직하고 그것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는 공동체로서의 교회야말로 교회다운 교회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에는 헤아릴 수 없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복음서는 씨앗이 뿌려지면 농부가 잠을 잘 때에도 저절로 자라난다고 말합니다(마르 4,26~29 참조). 교회는 가늠할 수 없는 말씀의 자유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의 속셈과 생각을 뛰어넘어 그 뜻을 이룹니다.”(복음의 기쁨 22항) 복음 말씀에는 세상을 거룩하게 하는 힘과 정의롭게 하는 원칙이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끊임없이 복음 말씀에 따라 쇄신되어야 하고, 복음 말씀에 따라 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세상과 동떨어진 채로 세상의 일들에 대해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세상의 일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세상 안에 머물면서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과의 친교에서 멀어지지 않도록 지키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2019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4) 교회 ③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로마 8,6) 교회가 사회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신자들 곧, 교회 안에 있는 분들 가운데서도 부정적인 생각을 지닌 분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20조 2항은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정교분리(政敎分離)” 또는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이 정치와 종교가 지배 권력을 두고 서로 대립하거나 갈등을 일으키지 않도록 하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가 사회의 일들에 대해 그 어떤 관심이나 의견도 가질 수 없다고 제한하는 근거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물론 “교회는 그 임무와 권한으로 보아 어느 모로도 정치 공동체와 혼동될 수 없으며, 결코 어떠한 정치 체제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 (그러나,) 교회가 인간의 기본권과 영혼들의 구원이 요구할 때에는 정치 질서에 관한 일에 대하여도 윤리적 판단을 내리는 것은 정당합니다. 이 때에 교회는 오로지 복음에 일치하고 다양한 시대와 환경에 따라 모든 사람의 복지에 부합하는 모든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사명에 속하는 일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245항~2246항) 세상이 발전하고 변화해 가면서 인간의 삶은 훨씬 더 편리하고 풍요로워지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빈부격차와 약육강식의 사회제도에 따른 불평등한 인권문제가 야기되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지켜보면서 그들의 현실이 단지 그들 자신의 무능력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기며 그 어떤 관심조차도 기울이지 않는다면,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는 예수님의 호된 질책을 들어야만 할 것입니다. 여전히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 교회는 침묵해야 하며, 오직 자기 종교의 교리에 관해서만 이야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의 정의로운 질서가 정치의 핵심 임무이지만,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복음의 기쁨 183항) 따라서, 교회는 이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면서 약자가 외면당하지 않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어가는 일에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모범을 따르며,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이 세상을 하느님의 질서에 따라 정의롭고 평화롭게 지켜야 할 사명을 수행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인간적 고통 앞에 중립이 있을 수 없습니다.”(“Con il dolore umano non si può essere neutrali.”- 프란치스코 교황) [2019년 10월 13일 연중 제28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5) 교회 ④ “하늘과 땅은 사라질지라도 내 말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마태 24,35) “세상이 변하는 만큼 교회의 가르침도 변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교회가 여전히 원론적인 윤리지침만을 강조한다면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교회를 떠나게 되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세상의 일들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이라고 한다면,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만큼 교회의 가르침 또한 달라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는 사회에서 교회가 변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며 시대에 걸맞지 않은 가르침들을 내어놓는다면 결국 교회가 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할 것이라고 이야기하며 윤리와 정의의 영역에서도 교회가 어느 정도는 양보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의견도 있습니다. 당연히 교회는 사회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여야 하고 동시에 쇄신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쇄신과 변화가 단지 사회의 요구대로 현실과 타협하거나 양보하는 모습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모든 변천 속에도 변하지 않는 많은 것이 들어 있으며, 그 불변의 것들은 어제도 오늘도 또 영원히 변하지 않으시는 그리스도 안에 궁극의 토대를 두고 있다고 확언합니다.”(사목 헌장 10항) 사회의 가치관이 변화하고 그에 따른 사람들의 삶의 양식이 달라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생명의 가치나 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사회 정의의 가치가 달라질 수는 없습니다.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간이 심지어 창조주의 영역에까지 이를 수 있게 되었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비윤리적인 실험과 생명경시를 묵과해서는 안되며, 비약적인 경제발전으로 국가경쟁력이 높아지고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고 해서 노동자들이 겪는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격차로 인해 발생한 소외계층과 극빈층의 이웃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사회의 변화와 발전 가운데서도 반드시 지켜져야만 하는 가치들에 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또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사회가 변화와 발전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가치들을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사회 구성원들이 스스로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려면 인간의 정신적, 도덕적 능력과 그의 끊임없는 내적 회개가 필요합니다. 마음의 회개에 최우선을 두는 것은 죄를 유발시키는 제도와 생활 여건을 적절히 개선할 의무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의무를 부과하는 것입니다. 제도와 생활 여건들은 정의의 규범에 맞아야 하고, 선에 해를 끼치지 않고 도움이 되도록 개선되어야 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888항) [2019년 10월 20일 연중 제29주일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 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6) 교회 ⑤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로마 12,6) 지난 6월 29일 창립된 우리 의정부교구의 “평신도 사도직협의회”는 신자들의 목소리를 교구장 주교님께 전달하고, 교구의 사목 방향 설정에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교회공동체에 주어진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본당공동체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결정권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주임신부’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본당사목구의 주임은 주교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사목적 권한에 따라 자신에게 맡겨진 신자들을 위해 큰 책임감과 사명감을 가지고 사목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무의 중대함이 교회 안의 다른 직무들을 배척하는 ‘성직자 중심주의’와 같은 독단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은 분명 옳지 않은 모습입니다. 가톨릭교회의 성직자들과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은 그 직무에 따라 구분될 뿐, 그 구분이 계급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은 신자공동체와의 교감(交感)과 동의를 바탕으로 사목 방향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하고, 신자공동체 역시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고 충분히 논의하여 한마음으로 복음의 가르침을 실천하고 실현하는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각각의 직무들이 서로 견제나 경쟁 또는 배척과 불신의 관계가 되는 것은 반드시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 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생으로 인하여 품위와 행위에 관하여 진정한 평등이 있고, 이로써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조건과 임무에 따라 그리스도의 몸의 건설에 협력합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72항)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참된 교회의 모습을 지니기 위해 각각의 직무들이 함께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은 “평신도를 의사 결정에서 제외시키는 지나친 성직주의의 유혹을 언제든 피하면서, 평신도를 성직자처럼 만들거나 성직자들을 세속화하지 않고, 각자의 선물과 역할에서 출발하여, 복음화를 위한 증언에서 모든 이의 상호협력을 강화하는 것입니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104항) 이처럼, 예수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복음 선포의 사명에 초대된 이들이 친교 안에서 같은 기쁨과 같은 감사를 나누며, 주어진 사명을 위해 함께 노력할 때,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교회의 참된 가치와 놀라운 신비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그리하여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십시오.”(요한 17,22) [2019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하느님을 알아 가는 기쁨 (57) 교회 ⑥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에페 4,4) 세상에는 그 숫자를 헤아리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종교(宗敎)가 있습니다. 그래서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 우리나라에서 종교는 개인의 ‘신념’이고 개인의 ‘선택’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가족들 간에도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다른 종교에 비해서 그러한 ‘강요’가 적은 것이 가톨릭교회의 장점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물론 종교를 강요하는 것은 좋은 모습이 아닙니다. 더욱이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강요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강요로써 신앙을 전하는 방식은 오히려 신앙의 가치를 훼손시키는 것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톨릭교회가 구원의 문제에 있어서 결코 “하느님을 믿어도 그만, 믿지 않아도 그만”이라고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가톨릭교회는 구원에 있어서 매우 분명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가르침은 오직 가톨릭교회의 신자들만이 천국에 가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에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이 단언은 자신의 잘못 없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사실, 자기 탓 없이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분의 교회를 모르지만, 진실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양심의 명령을 통하여 알게 된 하느님의 뜻을 은총의 영향 아래에서 실천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847항) 그러나 반대로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가톨릭교회를 필요한 것으로 세우신 사실을 모르지 않으면서도 교회로 들어오기를 싫어하거나 그 안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는 저 사람들은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교회헌장 14항) 따라서, 아직 복음의 기쁨이나 성사의 의미를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톨릭교회는 더욱 적극적으로 다가가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줄 수 있어야 하고, 동시에 가톨릭교회로부터 분리된 다른 그리스도교 종파의 사람들이나 그리스도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 속한 이들에게도 하느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지는 구원에 대해서 당당하고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사이좋게 지내기 위해서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침묵하거나 하느님 없이도 구원이 가능한 것처럼 다른 모든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오히려 자신의 신앙이 굳건하지 못함을 드러내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믿음을 위하여 훌륭히 싸워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십시오. 그대는 많은 증인 앞에서 훌륭하게 신앙을 고백하였을 때에 영원한 생명으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1티모 6,12) [2019년 11월 3일 연중 제31주일 의정부주보 11면, 왕태언 요셉 신부(신앙교육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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