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39. 주님(「가톨릭 교회 교리서」 446~455항)
내가 하느님의 ‘종’이라 생각할 때 그분은 나의 ‘주님’ 되신다 성탄절 전야미사 때였습니다. 그 날은 유독 더 혹독하게 추웠습니다. 성당 문 밖에는 남루한 옷을 입은 한 거지가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밍크코트를 입은 아주머니는 자녀에게 200원을 주며 구걸하는 이의 깡통에 넣으라고 합니다. 땡그랑 소리가 날 때 엄마는 “너도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알았지?”라고 말합니다. 미사 때 그 아주머니는 구유의 아기 예수님을 보며 “너무 추워 보이시네요. 제가 내년에는 비단이불 꼭 봉헌할게요. … 우리 애 대학 붙여주시면…”이라고 기도합니다. 남편은 “예수님, 내년엔 제가 꼭 금관 씌워드리겠습니다. … 사업 잘 되게 해 주시면…”이라고 기도합니다. 미사가 끝나고 모두가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밖에서 떨던 거지는 너무 추워 몰래 성당으로 들어옵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예수님이 더 추워 보입니다. 거지는 자신의 누더기 옷을 벗어 아기 예수님께 입혀주고는 그 옆에 누워 다시 깨어날 수 없는 잠이 듭니다. 한 성탄절 연극입니다. 거지와 부잣집 부부 중 누가 예수님을 참으로 ‘주님’으로 인정한 것일까요? 예수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믿었던 부부였을까요, 아니면 자신의 것을 내어드려야 했던 거지일까요? 예수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마태 7,21)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주인님’의 줄임말입니다. 주님은 ‘소유’하시는 분입니다.(450항 참조) 그리고 주님이라 부르는 이는 그 주님의 소유가 됩니다. 주님은 영어로 ‘Lord’입니다. ‘영주’를 뜻합니다. 그 영주가 고용한 농노들은 영주의 농토에서 경작을 하여 영주에게 소출의 70~80%까지 바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영주에게 감사해야 했습니다. 영주가 보호해주지 않으면 산적 떼에게 모두 강탈당하거나 혹은 땅을 받지 않으면 아예 굶어죽어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은 가진 것을 다 내어놓더라도 주인에게 무언가 준다고 여길 수는 없습니다. 종으로 삼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의 소유가 된 종은 낮에는 밭에 나가 일을 하고, 저녁때는 주인 식사 시중을 들고 나서도 항상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라고 말해야 합니다. 주인이 아니었으면 자신은 굶어죽을 처지였음을 아는 종이 참 종입니다. 당연히 아버지께 유산을 청했다가 나중에는 회개하고 돌아온 탕자는 아버지께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 주십시오.”(루카 15,19) 회개란 이처럼 주님께 아무것도 요구할 수 없는 처지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형은 자신이 아버지께 무언가 해 드린다고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이처럼 주님께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회개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종은 아무리 내어놓아도 주님의 집에서 산다는 행복의 단 1%도 갚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을 ‘소’로 만들었습니다. 하느님을 자신들의 ‘종’으로 만든 것입니다. 위 연극의 부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봉헌하려는 것들은 무언가를 되받기 위한 하나의 여물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우상숭배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9-30)라고 하십니다. 멍에는 소가 메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의 소라고 생각할 때 그분이 나의 주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자아의 압제로부터 해방된 참된 안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바치는 것도 아까워하였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입니다. 봉헌을 해도 그 봉헌에 감사가 섞이느냐, 그렇지 않느냐로 카인과 아벨이 구분됩니다. 우리가 미사 때 봉헌하는 빵과 포도주는 부끄러운 종의 마음으로 바쳐야합니다. 그리스도는 ‘주님!’이라 불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분의 부당한 종입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10월 6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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