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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40: 강생(456~463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19-10-15 조회수1,976 추천수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40. 강생(「가톨릭 교회 교리서」 456~463항)


하느님이 인간 되신 이유는 인간을 하느님 되게 하시려는 것

 

 

한 줄무늬 애벌레가 알에서 깨어나 나뭇잎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그리고 조금 성장하자 자기 존재의 이유를 찾습니다. 다른 애벌레들처럼 세상에서의 성공을 존재 이유로 믿고 경쟁의 세계에 돌입합니다. 애벌레들은 서로를 밟으며 구름까지 닿는 기둥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다 노랑 암컷 애벌레의 머리를 밟습니다.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둘은 사랑에 빠집니다. 잠시 경쟁을 접고 아래로 내려와 사랑을 나눕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다시 궁급해합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노랑 애벌레를 떠나 다시 기둥을 오르기 시작합니다. 줄무늬 애벌레가 그러는 사이 노랑 애벌레는 나뭇가지에 달린 고치를 만드는 한 애벌레를 만납니다.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으나 오히려 고치를 만드는 애벌레는 자신처럼 해야만 나비로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해줍니다. 정말 자신의 몸에서 실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노랑 애벌레는 고치를 만들고 며칠 뒤 노랑나비로 태어납니다.

 

노랑나비는 애벌레 기둥 주위를 맴돌며 줄무늬 애벌레를 찾습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기둥 맨 꼭대기에서 떨어지지 않으려 발버둥치고 있었습니다. 노랑나비는 줄무늬 애벌레에게 무언가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인공 애벌레는 나비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나비의 따뜻한 눈빛에 끌립니다. 이전에 보았던 눈빛입니다. 줄무늬 애벌레는 자신의 위치를 포기하고 기둥을 내려옵니다. 그리고 나비가 가리키는 찢어진 고치를 봅니다. 자신의 몸에서 실을 뽑아 몸에 감아봅니다. 며칠 뒤 호랑나비가 탄생합니다.

 

두 나비는 이제 쓴 풀이 아니라 꿀을 먹으며 하늘을 납니다. 그리고 허공을 오르는 애벌레들에게 “그 위엔 아무 것도 없어. 너희들도 나비가 될 수 있어. 그래서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라며 말을 하지만 애벌레들은 들으려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두 나비는 멈추지 않습니다. 애벌레들 속에 숨겨진 나비를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 줄거리입니다.

 

인간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일까요? 성공해봐야 공허밖에 남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느님으로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사랑할 수 있어야 영원한 생명의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데 사랑해야 하는 줄 안다고 사랑할 수 있을까요? 1964년 어느 날 밤, 미국 뉴욕의 주택가에서 키티 제노바스라는 여성이 30여 분간 폭행을 당하고 사망합니다. 그녀의 비명소리를 들은 사람이 무려 38명이나 되었지만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남을 도와줄 수 없었던 이유는 아직 애벌레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애벌레 수준이면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신과 같은 애벌레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면 나비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제노바스가 폭행당하는 예수님으로 보였다면, 혹은 적어도 자기 가족으로 보였다면 신고하지 않고 가만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사랑은 해야 되는 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새로 태어나야’ 할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나려면 새로운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을 알게 하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458항 참조) 예수님은 “인간을 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인간이 되셨습니다.”(460항) 당신 자신이 아버지께서 자녀에게 주시는 양식이라 하시며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심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460항 참조) 예수님은 우리도 당신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알게 해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460항 참조)

 

사람에게 태어났어도 늑대에게 길러져 부모가 늑대라 믿으면 늑대의 본성으로 삽니다. 그러다 자신의 부모가 인간이었음을 알게 되면 참 인간으로 새로 태어납니다. 새로 태어남은 아버지가 누구인지 앎으로써 결정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참 아버지가 하느님이심을 알려주러 오신 것입니다. 이 새로 태어남만이 우리 안의 이전 본성, 애벌레의 본성, 즉 원죄를 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457항 참조)

 

마더 데레사가 길거리에 쓰러져있는 한 행려자로부터 예수님 음성으로 “목마르다!”라고 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 일로 모든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님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인다는 말이 맞습니다. 내가 예수가 돼야 모든 이가 예수로 보입니다. 내가 예수가 되려면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라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하느님의 유일한 아드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가톨릭신문, 2019년 10월 13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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