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46. 평화의 누룩이 돼야 할 신앙인(「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나 자신부터 화해와 용서의 누룩으로 변화해야 가타리나: 신부님, 요즘 저희 아이들이 자꾸 유튜브를 보면서 ‘△△충’이라는 말을 하더라구요. 그런데 아무 생각없이 그 말을 쓰면서 상대방을 비난하더라구요. 저는 깜짝 놀랐어요. 저희 아이들에게 주의를 줘야겠어요! 이 신부: 아, 그러셨군요! 그리스도인,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 사회에도 평화를 위협하는 여러 갈등과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이민과 난민, 무역 갈등을 포함한 여러 지역적인 분쟁 등 국제적인 갈등들도 많습니다. 최근 홍콩 사태를 둘러싼 국제사회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대학가에서도 충돌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웃과 세상을 향해 평화를 이루는 일은 신앙인에게 최우선적인 소명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참된 평화를 생각하며 우리는 어떻게 평화를 이뤄야할지 고민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바로 ‘나 자신이 평화를 이루는 사람이 돼야 한다’ 라는 진리에서 시작해야 함을 떠올려 봅니다. 안타까운 신조어 ‘△△蟲’(벌레 충)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서 ‘△△충’이라는 신조어가 급속히 확산됐습니다. ‘맘충’, ‘한남충, ’출근충’. 수많은 이런 표현들이 무분별하게 SNS와 일상의 대화 속에서 사용됩니다. 이 표현들은 대상을 비하하며 부정적 감정과 맹목적 갈등을 부추깁니다. 친교와 관계성을 파괴하고 적대감과 증오를 자아냅니다. 인신공격에 가까운 이런 표현들이 왜 생기는 것입니까? 성공만을 지향한 살인적 경쟁과 서열의식 등, 구조적 병폐로 인해 사회가 각박해졌다는 의견도 많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이기주의와 미성숙함’의 결과입니다. 성공과 물질주의, 소비문화에 빠져 윤리와 신앙, 정신적 가치들, 이웃과 사회를 도외시한 결과입니다. “주일학교는 빠져도 되지만 학원을 빠지는 것은 있을 수 없다”라는 잘못된 인식이 낳은 결과입니다. 빠르게 발전하는 기술문명과 달리 우리의 인식과 성숙함은 오히려 퇴보한 것은 아닐까요? 사람과 공동체를 소중히 하고 어려움 속에서 신앙과 사랑의 가치를 찾는 문화가 약해진 것은 아닐까요? 나 자신이 평화를 향한 순례자가 돼야! 평화를 이루는 일의 중요성을 얼마나 공감하십니까? 비록 식별하고 판단하기 어려운 수많은 사안이 있다 해도 우리는 관심을 갖고 기도와 연대를 통해 평화를 이루는 일에 함께해야 합니다. 내 집 앞의 쓰레기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닙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다만 피한다고 해서 평화가 이뤄지지 않습니다. 평화를 위협하는 요소들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개선과 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선적인 노력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조건적인 혐오와 증오가 가득하고, 성찰과 양심이 결여된 문화 속에서 평화를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이 화해와 용서의 누룩이 될 때, 그런 잘못된 문화도 변화되고, 고통 받는 이웃에게 관심을 갖고 기도하고 돕게 됩니다. 또한 권력과 군사력, 경제력과 힘으로 선한 이들을 탄압하는 거대한 악에도 저항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화는 바로 하느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는 사회의 이성적, 도덕적 질서 위에 세워진 가치이며 보편적 의무이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가 아니며, 적대 세력 간의 균형 유지로 격하될 수도 없다. 그보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요구한다.”(「간추린 사회교리」 494항) [가톨릭신문, 2019년 11월 24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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