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51. 예수님과 율법(「가톨릭 교회 교리서」 574~582항)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저주’를 푸시려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2009년 제주도 어떤 아파트에서 불이 났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두 아들, 이렇게 4명의 일가족이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검은 연기에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아파트 베란다에 매달려 구조를 요청합니다. 산소호흡기가 없이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 불가능해보입니다. 다행히 제때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아들을 구조합니다. 그러나 한 아들이 구조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는 오열합니다. 아버지는 물에 적신 수건 한 장만 들고 불속으로 다시 뛰어들려고 합니다. 하지만 소방관에 의해 저지당합니다. 다른 소방대원을 한 번 더 확인하라고 들여보냈으니 아버지는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집의 구조를 아니까 자신이 들어가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소방관도 아버지에게 설득당해 함께 산소를 나누어 마시며 다시 올라가보기로 합니다. 확인 차 들어갔던 다른 소방대원이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보고할 때 아버지는 아이를 찾아 데리고 나옵니다. 다시 하나가 된 4명의 가족이 서로 끌어안고 눈물을 흘립니다. 불이 난 아파트 앞에는 뛰어나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도 아이를 구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아버지처럼 불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습니다. 어째서 아버지만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불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을까요? 그 아이의 ‘아버지’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행동은 율법이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자기정체성이 만듭니다. 사랑해야 하는 줄 알아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약에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율법은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사랑하라’입니다.(로마 13,10 참조)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곧 율법의 모든 내용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이 구약의 율법을 지킬 수 있었을까요? 구약의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킬 수 없음을 알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킬 수 있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스스로의 힘으로 율법을 지켜보겠다고 했던 이들이 바리사이-율법학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상태를 “율법의 저주”(580항; 갈라 3,13)라고 부릅니다. 시나이 산에서의 ‘첫 계약’으로 주신 율법은 ‘새 계약’이 주는 ‘은총의 빛’으로만 온전히 해석될 수 있습니다.(577항 참조) 불속으로 뛰어든 아버지는 사랑해야 한다는 율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아버지’는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뛰어들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내가 ‘인간’이라 믿으면 그런 상황에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버지’처럼 불속에 있는 아들과의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야 합니다. 만약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믿으면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로 보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라 믿으면 또 다른 하느님의 자녀를 불속에 그대로 둘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미 알고 있는 율법을 새로운 정체성을 알려주시어 지키게 만들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어야만 사랑의 율법이 자신 안에서 완성됩니다. 엄마 코끼리가 부모 없는 아기 돼지가 자신을 엄마로 믿게 하려면 먼저 긴 코를 잘라야합니다. 그러면 아기 돼지는 자신의 코와 같은 모습의 어미 코끼리를 자신의 엄마로 믿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은 피의 열매’입니다. 자녀는 부모의 희생을 보고서야 그 부모의 자녀임을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피 흘리게 하신 이유도 인간이 하느님의 자녀임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하여 율법이 완성됩니다.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자녀라 믿는다면 ‘하느님의 종’의 “가슴에”, 곧 그 “마음에”(예레 31,33) 새겨져 있는 율법(580항 참조)이 자동적으로 실천되게 됩니다. 이 믿음을 주기 위해 하느님께서 인간 역사에 개입하신 사건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죽음입니다.(579항 참조) 밀떡도 그리스도와 하나가 됨으로써 하느님이 될 수 있다면 그 성체를 영하는 인간도 하느님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됩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돌아가셨습니다.”(히브 9,15; 589항) 내가 그리스도와 하나라고 믿어야 사랑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모든 죄로부터 해방됩니다. [가톨릭신문, 2020년 1월 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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