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여정을 시작하며 – 고통과 인간의 삶 프랑스의 문호 알베르 카뮈의 1947년작 소설 ‘페스트’는 불가항력의 고통을 마주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소설의 배경은 1940년대 프랑스령 알제리 북부의 작은 해안 도시 오랑입니다. 이곳에서 갑자기 페스트가 발병하였고, 도시는 격리 조치당합니다. 외부와 고립된 상태에서 죽음의 위협은 무려 1년이나 지속되었고, 도시 안에 갇힌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절망적인 현실과 마주합니다. 그러던 중 등장인물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투병 중이던 어린아이가 결국 숨을 거두었고, 소설의 긴장도 극에 달합니다.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서 주인공 리유는 이렇게 절규합니다. “어린애들마저도 주리를 틀도록 창조해놓은 이 세상이라면 죽어도 거부하겠습니다.” 리유의 절규를 보며, 우리는 이러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의도에 대해 고민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고통과는 무관한 분이실까요? 아니라면 어째서 이 세상 고통을 내버려 두시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들 인간의 일생은 다른 말로 고통의 여정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태어나서 성장하고 나이가 들고 결국에는 죽음으로 향하는 삶이라는 여정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고통과 마주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우리는 리유와 같은 질문을 계속해서 던지기 마련입니다. “왜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시는가?” 어느 때는 어려움을 딛고 열심히 기도하던 사람들도 상황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으면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평소에 하느님을 믿지 않던 사람들의 경우입니다. 그들 또한 고통스러운 상황을 마주하면 리유처럼 하느님께 원망의 화살을 돌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결국 고통과 마주한 인간은 그 안에서 고통의 원인에 대해 질문합니다. 그러는 가운데 하느님을 의지하거나 반대로 원망하기도 합니다. 결국 각자가 나름의 방식으로 고통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하느님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사회교리는 바로 이 고통의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역사 안에서 사회교리는 교회가 세상 고통과 마주하며 정립되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세상 고통을 보았고, 그 가운데 하느님의 가르침을 떠올렸고, 고통의 현장에 동참하는 방법입니다. 이를 통해서 교회는 리유와 같은 사람들의 의문에 응답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앞으로 1년간 사회교리에 관해 설명드리게 될 것입니다. 사회교리의 여정을 따라오시면서, 인간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이를 방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과, 그분을 믿는 신앙인들이 모인 교회의 역할에 관해 함께 고민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019년 12월 22일 대림 제4주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구리 부주임)] [사회교리] 구약의 하느님 (1)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정말 인간의 고통에 무심한 분이셨을까요? 지난주, 연재를 시작하면서 고통의 문제로 운을 띄웠습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세상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실까요? 이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성경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우리보다 앞선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하느님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그들의 체험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실천한 모세 탈출기의 시작 부분에서,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 중이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고역에 짓눌려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하느님께서는 이어 한 사람을 선택하시는데, 그가 바로 모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현실에 개입하셨습니다. 모세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였지만, 그로 인해 그의 인생에는 그야말로 고생길이 펼쳐졌습니다. 파라오와 대적하여 갖은 고생 끝에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해내지만, 눈 앞에 펼쳐진 것은 광야였습니다. 외딴 광야를 헤매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모세는 백성들의 온갖 원망을 감내해야 했고, 때로는 그들을 위하여 하느님과 담판을 짓기도 했습니다. 40년에 걸친 유랑 끝에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는 데까지 이르렀지만, 정작 자신은 수명이 다하여 눈을 감게 되고 맙니다. 이런 모세의 유언이 어찌 보면 놀랍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그였지만, 삶의 마지막에서 모세는 동족들을 축복하고 격려합니다. “너희는 힘과 용기를 내어라. 그들을 두려워해서도 겁내서도 안 된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와 함께 가시면서, 너희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다.”(신명 31,6) 이어 모세는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며 생을 마감하는데, 이는 인생 여정 중에 하느님께서 함께하심을 체험한 사람만이 남길 수 있는 고백입니다. 모세는 소명으로 인해 생전에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그만큼 하느님과 함께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 모세의 생애를 보며 하느님께서 세상 고통에 개입하는 방식 역시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처럼 당신을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부르십니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세상을 바꾸어 나가십니다. 부조리한 고통이 만연한 세상이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느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음 주 예언자들을 통하여 이를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2019년 12월 29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가정 성화 주간)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구리 부주임)] [사회교리] 구약의 하느님 (2)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뜻을 전하셨습니다 예언자의 시대 사람과 사람이 모여 사는 곳에는 언제나 불의가 들어옵니다. 불의는 죄를 동반하는데,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느님을 외면할 때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 역시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과 맺었던 계약을 종종 외면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포기하지 않으셨고, 그들 역사 안에서 계속해서 예언자들을 파견하셨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는 사람들입니다. 출신도 다양했습니다.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은 사제였고, 아모스는 목양업자였으며, 호세아는 농민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른 그들의 메시지는 한결같이 정의에 기반을 뒀습니다. “그 정의는 특히 가난한 이, 억눌린 이, 외국인에 대한 것이며 주님의 자비를 눈에 보이게 증언하는 것”(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 14항)이었습니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당대의 구체적인 현실 사건들을 배경으로 합니다. 따라서 사회 · 정치 · 경제 · 외교에 관한 문제들을 포함함은 물론입니다. 결국, 하느님께서는 구체적인 현실 안에서 당신의 정의가 세상에 드러나기를 바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십니다 모세와 예언자들의 예를 보며 구약의 하느님께서는 결코 세상일과 인간 고통에 무관심한 분이 아니심이 드러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을 불러모으셨습니다.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은 세상에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며 살아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통해 고통이 가득한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 길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지만, 모세처럼 주어진 길을 다 걷고 난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게 됩니다. 길 안에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여러분 역시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모세는 “내가 너를 보낸다.”(탈출 3,10)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듣고 백성을 이끌고 약속된 땅으로 출발합니다(탈출 3,17 참조).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 한다.”(예레 1,7)고 말씀하십니다. 오늘날, “가라.”고 하신 예수님의 명령은 변화하는 상황들과 교회의 복음화 사명에 언제나 새로운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모두 선교를 향한 이 새로운 출발로 부름받고 있습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권고, 「복음의 기쁨」, 20항) [2020년 1월 5일 주님 공현 대축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구리 부주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