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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56: 청년들에게 희망을! - 격려와 사랑의 보금자리로서 교회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02-09 조회수2,032 추천수0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56. 청년들에게 희망을! - 격려와 사랑의 보금자리로서 교회(「간추린 사회교리」 33항)


청년 없는 청년 사목, ‘참여와 경청’에 답이 있다

 

 

베드로: 신부님, 친구가 냉담을 하고 있어요. 성당에서 봉사를 하면서 지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본당의 위계적인 분위기와 권위적인 모습들에 실망도 많이 했더라구요. 존중받지 못하고 혹사당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제 주변에 그런 친구들이 꽤 있어요. 저도 많이 안타깝습니다.

 

이 신부: 아 그렇군요!

 

 

성당에 청년이 없어요!

 

본당 청년 담당 신부님들은 고민이 많습니다. 많은 본당에서 청년들이 줄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가톨릭사목연구소가 발표한 2019년 자료에 따르면 청년들의 미사 참례율은 5% 수준입니다. 청년이 감소하기에 교회의 미래도 우려스럽습니다. 왜 이런 상황이 발생했을까요? 일단 현실적인 문제가 큽니다. 실제로 많은 청년들은 과도한 경쟁과 실업, 살인적인 집값과 교육비, 비정규노동이라는 현실에 처해 있습니다. 바쁘게 시간을 내어 봉사하기에는 이들의 현실적 여건이 매우 고단한 것입니다.

 

이는 신자유주의와 거대 투기자본의 전횡, 인간이 소모품으로 전락하는 노동현실이 야기한 현상입니다. ‘불평등의 경제’, ‘이놈의 경제가 사람 잡네’라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표현하셨듯이, 일자리는 점점 사라지고 결혼과 가정을 포기하는 등 젊은이들이 미래를 설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 교회에 대한 실망 때문이라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존재합니다. 이미 탈종교화가 진행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제도적이고 권위적인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신부님, 저희도 많이 지쳤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신앙생활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얻기보다 본당활동 중에 지치고 힘들다고 합니다. “성당에 가면 일꾼으로 취급받는다.”, “비합리적인 일에 대해 어떠한 항변도 할 수 없다.”, “일부 사제와 수도자들에게 실망스럽다.” 같은 이야기는 이제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청년들도 약자라고 인식을 한다면 과도한 표현일까요? 그러나 장유유서(長幼有序)가 지배적인 한국교회 현실에서 청년신자들은 마당쇠, 머슴, 무수리 같은 약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어렵고 힘들게 봉사를 한다는 것만이 아니라, 존중과 배려를 못 받는데 있습니다.

 

실제로 교황께서도 “상당수의 젊은이들이 다양한 이유로 교회에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들의 삶에서 의미 있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리스도는 살아계십니다」 40항)라고 하십니다. 어쨌거나 5%라는 청년 신앙생활 지표는 분명 전면적인 개혁이 필요해 보입니다. 본당과 여러 사목 현장에서 청년들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는 지금의 현실은 시급히 바뀌어야 합니다. 그래서 최근 열렸던 여러 회의에서는 ‘참여와 경청’, ‘청년들이 주역이 돼야 함’, ‘사목계획 수립과 시행에 청년들이 직접 참여함’ 등이 제안됐습니다.(2018년 세계주교대의원회의, 2015~2019 대전교구 시노드)

 

 

“복음적 가치는 바로 서로에게 친구, 가족이 돼 주는 것!”

 

‘청년에게 희망을’이라는 거창한 제목으로 시작했는데, 막상 그 희망의 비결에 왕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기본에 충실한 것이 중요하다 싶습니다. 그 기본이란 교우들은 신앙생활에 힘쓰고, 사제들은 그 교우들을 위해 올바로 사목하고, 교회는 모든 이를 존중하며 특별히 가장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의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 방법은 복음의 가치를 회복하는 것, 즉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나 가족이 돼 주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 지금의 가톨릭교회가 사목이 아니라 ‘사업’을 한다는 조심스러운 우려가 많습니다. 사목과 사업은 매우 다릅니다. 사업은 돈을 버는 것이지만, 사목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것처럼 생명을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린다는 것은 현실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그를 존중해 주고, 함께 아파하며, 그에게 친구나 가족이 돼 주는 것입니다. 가상 캐릭터인 펭수나 카카오라이언이 왜 사람들의 마음을 끌겠습니까? 그들이 친구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가톨릭교회는 분명히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자본주의 풍토 속에서 기복신앙과 물질주의로 흐르며 사랑의 실천에 소홀했기 때문은 아닐까요? 하지만 참된 교회는 가난하고 약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는 교회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런 아름답고 거룩한 교회를 만들어 갈 때 청년들에게도 참된 희망이 선사될 것입니다.

 

“하느님 백성의 삶의 법칙인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사회적 정치적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영감을 불어넣고 이 관계를 정화하며 더 높은 차원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33항)

 

[가톨릭신문, 2020년 2월 9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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