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59.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638~647항)
부활에 대한 확신이 십자가를 지게 한다 인도의 시성 타고르의 시 ‘기탄잘리’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죄수여, 말해주렴, 누가 그대를 가두었는지?” “그것은 내 주인이옵니다. 나는 이 세상에서 돈이나 권력으론 누구보다도 뛰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보물창고에는 왕에게나 어울릴 돈을 모아 놓았지요. 그런데 깨어보니 나는 보물창고에 갇힌 죄수가 되었더군요.” “죄수여, 말하렴. 누가 이 끊어지지 않는 쇠사슬을 만들었는지?” “그것은 나였어요. 내가 이 사슬을 정성껏 만들었습니다. 나는 내 불굴의 힘으로 온전한 자유를 누리도록 이 사슬로 세계를 사로잡을 것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윽고 사슬이 다 만들어져 끊을 수 없을 만큼 튼튼하게 되자 이 몸은 사슬에 꽉 잡혀 매여 있더군요.” 자신이 자신에게 구속당할 수 있고 자기 자신의 죄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원죄의 영향이기에 모든 인간이 예외 없이 체험하는 현상입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 두 양 극단의 본성에 영향을 받습니다. 교리서는 이 부분에 대해 “인간은 영혼과 육체로 구성된 복합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안에는 이미 어떤 긴장이 깃들어 있으며,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 일종의 싸움이 벌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 이 싸움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영적 투쟁의 일부분이다”(2516항)라고 가르칩니다. 이 두 본성은 서로 원하는 것이 달라서 우리 안에서 항상 싸움을 일으킵니다. 일단 이 두 극단의 본성이 하나가 된 이상 한 본성이 완전히 승리하기 전까지는 이 두 본성이 싸움을 멈추지 않습니다. 이성적으로 육체의 본성을 이기면 되는 것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이성의 법으로 육체의 법을 이길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이 어려움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로마 7,19-20)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일단 ‘율법’을 주시어 육체의 법에 끌리는 것이 결국 영혼을 파멸로 이끈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인간이 육체의 본성을 이겨 결국 이성의 법 안에 육체까지 통합되어 구원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교회도 “하느님의 도우시는 은총과 커다란 노력이 없으면 자기 자신 안에서 통일을 이룰 수 없다”(409항)고 천명합니다. 이처럼 영과 육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인간은 하나의 통합을 이루기 위해 반드시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싸움은 승리할 희망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의 승리란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대로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19-20 참조)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 죽음으로써 한 인간이 어떻게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지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 약속이 당신의 부활입니다. 이 죽음과 부활이 우리가 따라야 하는 파스카 신비의 정점입니다.(638항 참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수차례 예고하신 대로 부활의 확신이 있으셨기 때문에 십자가의 길을 가실 수 있으셨습니다.(마르 8,31 참조)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의 ‘빈 무덤’은 이런 의미로 우리가 우리 육체의 본성과 싸운 뒤에 더 이상 죽은 이들 가운데 머물지 않아도 된다는 상징적 의미를 전해줍니다.(640 참조) 또한 예수님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단순히 사도들로부터가 아니라 여인들을 비롯한 모든 교회 구성원들 안에서 자라나 교회 전체의 믿음을 형성하기를 원하셨습니다.(641~644항 참조) 이 모든 증언은 결국 육체와 싸운 십자가의 삶이 어떻게 끝나게 될 것인지를 알려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그분의 “육신은 수난의 흔적을 아직 지니고” 계셨습니다.(645항 참조)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사는 인간이 더 이상 육체의 인간, 속세의 인간이 아닌 “하늘의 인간”(646)이 되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는 그분께서 내려주시는 성령의 힘으로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이들 안에 각인되었고 우리는 ‘십자가의 길’만이 아닌 ‘십자가를 통한 부활의 믿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647항 참조) 우리는 이 승리에 대한 확신으로 “태초부터 시작되어 주님의 말씀대로 마지막 날까지 계속될”(409항) 이 힘든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부활의 희망으로 그분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톨릭신문, 2020년 3월 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영성관 관장 · 수원가톨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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