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81. 노동 에피소드 2편 - "상처로서의 현장과 생명의 증거자, 그리스도인”(「간추린 사회교리」 52항)
우리 사회의 아픈 곳에 하느님 사랑 전하기 위해 “가난한 이에게 네 손길을 뻗어라. 따라서 이 말씀은, 자신이 공동의 숙명에 동참하고 있음을 느끼는 인간으로서 저마다 지닌 책임감으로 부르는 초대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약한 이들의 짐을 짊어지라는 권고입니다. 이는 바오로 성인의 다음과 같은 말씀과 일치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 하신 계명입니다.…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갈라 5,13-14; 6,2).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가 받은 자유는 다른 이들,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봉사해야 하는 우리의 책무라고 가르칩니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의 진정성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2020년 제4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문 중) 현장 속에서 지향하는 것 소심하게 살았고 본당에서만 일했던 탓인지, 노동사목에 와서 노동쟁의 현장에 다니는 것이 쉽진 않았습니다. 그곳은 첨예한 대립과 고단함이 흐르는 곳이었습니다. 가끔 농성장에서 미사를 드릴 때도 있습니다. 서울역에서,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광화문광장과 김천 도로공사 사옥 등등에서! 그런데 얼마나 진땀이 흐르던지! 이에 대해 길거리에서 고생한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시고, 반면 왜 신부가 그런 곳을 가는가 비판하시는 분도 계셨습니다. 한번은 대한문 앞에서 대량해고 당한 분들을 위한 미사를 드리는데 지나가는 사람에게 ‘빨간 사람’이라는 비아냥도 들었습니다. 저도 공산당이 싫은데 말이죠. 마침 그날이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이라 빨간 영대를 하긴 했어요. 다소 억울하긴 했습니다. 거기서 미사 드린다고 사안이 해결되지도 않는데 비난도 들으니 섭섭했습니다. 분명 거리 미사는 극히 예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결코 정치적 이익을 위함이 아니라 모든 이의 화합과 상생을 지향하며 성사적 친교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대립과 갈등 속에서 피어나는 길 제가 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부위원장 때의 일입니다. 당시에 위원장 신부님과 도심 농성장의 기자회견에 참가했습니다. 지방에서 상경한 시멘트 회사 노동자들인데 불법파견과 부당해고에 항의하며 서울 본사 앞에서 시위 중이었습니다. 수백 명 경찰이 둘러싼 가운데 기자회견을 마치고 탄원을 담은 진정서를 전달하려 회사정문으로 갔는데 건물 보안요원과 마찰이 발생했습니다. 입장 불허와 진정서 전달 요구가 충돌한 것입니다. 그 상황은 험악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검은 양복을 입은 요원들과 흥분한 노동자들의 대치로 분위기는 순식간에 일촉즉발로 치달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위원장 신부님이 군중을 헤치고 나가 가장 앞에서 천주교 사제라 소개하며 일단 사람들을 진정시켰습니다. 이어서 보안 요원들과 대화를 나눴습니다. 보안요원들도 결국 윗선의 지시를 받아 시위대를 막을 뿐이었고, 이들을 설득했더니 대화의 물꼬가 트였습니다. 급기야 회사 대표가 나왔고 진정서를 전달했으며 상황이 수습됐습니다. 상생과 대화를 향한 중재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 세리와 창녀, 병자들, 죄인들에게도 찾아가셨습니다. 상처 받은 이들에게 찾아가신 것입니다. 노동현장 역시 상처 받은 이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사회적 난제(難題)도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를 나누는 것과 함께 해결에 도움을 주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 방법은 대화를 위한 중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유일한 중재자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게 되기를 바라신다”(1디모 2,4-5 참조)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구원과 생명을 지향하는 교회는 바로 그 중재를 위해 가장 아픈 곳으로 가야 합니다. 노동사목을 하며 수많은 갈등 현장을 보았습니다. 현실적 이해관계의 조정과 대화가 너무나 어렵다는 것을 매번 절감합니다. 물론 현장에 따라 냉정한 식별도 필요합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역할을 해야 하고 때로는 종교를 세속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장은 분명 가장 약한 이가 머무는 곳이고 우리 사회의 상처입니다. 그곳을 찾고 그곳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어느 곳이건 교회를 통해 복음과 생명은 피어나야 합니다.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과 생명을 증거하는 이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에 따라 성령 안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중심으로 모인 교회 공동체들은 스스로를 친교와 증거와 선교의 자리이며 사회 관계의 구원과 변화를 위한 촉매로 드러난다.”(「간추린 사회교리」 52항) [가톨릭신문, 2020년 8월 9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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