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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92: 우리의 부활(988~1019항)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0-11-01 조회수2,496 추천수0

[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92. 우리의 부활(「가톨릭 교회 교리서」 988~1019항)


자신의 육체를 대하는 자세가 부활 이후를 결정한다

 

 

헨리 벤 다이크(Henry Van Dyke)의 저서 「네 번째 동방박사」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온 동방박사 세 사람 외에 알타반(Altaban)이라는 동방박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아기 예수님께 드릴 세 가지 예물 즉, 루비, 사파이어, 진주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알타반이 말을 타고 베들레헴 쯤 도착했을 때 앞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습니다. 마음이 급한 알타반은 망설이다가 그를 돕기로 하고 다른 세 박사 일행을 먼저 보냈습니다. 죽어가는 자를 낙타에 싣고 주막 주인에게 맡기고는 루비를 꺼내 주었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약속한 곳에 갔지만 세 박사는 떠났고 아기 예수님도 헤로데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하신 후였습니다. 허탈해하고 있는데 말발굽 소리와 비명 그리고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헤로데 왕이 사내아기들을 죽이기 위하여 보낸 군사들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아기를 구하기 위해 남은 예물 중 사파이어를 꺼내 병사의 대장에게 주었습니다. 이후 그는 아기 예수님을 찾아 이집트로 갔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33년의 세월이 흘러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습니다. 마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알타반은 ‘33년이나 찾아 헤맨 왕이 돌아가시다니…. 진주를 주고서라도 구해야지’라고 말하며 골고타로 뛰어갔습니다.

 

정신없이 달려가는데 노예로 팔려가던 소녀가 알타반의 다리를 끌어안고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불쌍한 마음이 들은 그는 예수께 바치려던 마지막 보물 진주를 소녀의 몸값으로 주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드릴 예물도 없는데 왕을 무슨 면목으로 보나!’ 이런 걱정할 때 큰 지진이 일어났고 기왓장이 그를 덮쳤습니다. 피 흘리며 죽어가는 그의 귀에 커다란 그리스도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나는 이미 너의 경배를 세 번씩이나 기쁘게 받았다. 이제 내가 너를 맞을 준비를 하겠다. 나는 영원히 네가 나에게 주려고 한 것을 부족함 없이 갚아 주겠다.”

 

마지막 예수님 말씀은 제가 조금 바꿔봤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기쁘게 하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도 기쁘게 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신경은, 세말에 이루어질 죽은 이들의 부활과 영원한 삶에 대한 선언에서 절정에 이릅니다.”(988)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며 영원히 사시는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로마 8,11)”(898)

 

죽음이 육체와 영혼의 분리라면, 부활은 다시 육체와 영혼이 결합되는 것입니다. 인간의 죽음은 죄의 결과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육체의 죽음도 없었을 것입니다”(1008)라고 하듯, 아담과 하와는 본래 죽음을 보지 않게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이 교회 가르침입니다. “사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죽음은 ‘죄가 주는 품삯’(로마 6,23)입니다.”(1006)

 

예수님께서는 어차피 죽을 육신으로 살지만, 인간이 어떻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할 수 있는지를 알려주러 오셨습니다. 그 방법이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을 이기는 것”(1019)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 순종하여 죽음을 받아들이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삶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죽음을 향한 “예수님의 순종은 죽음이라고 하는 저주를 축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1009) 나의 죽음은 이웃을 향한 선행으로 이어지는데, 그리하여 “선을 행한 이들은 부활하여 생명을 얻고 악을 저지른 자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요한 5,29)”(998)

 

어차피 썩어 없어질 육체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결합함으로써 그분 부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2티모 2,11) 우리는 “그분을 뵙기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1011)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는 순교로 가는 길에서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님과 일치하려고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1010)라고 말했습니다. 그에게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이란 “지상의 모든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1011)이었습니다. 우리가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는 것이 이득입니다”(필리 1,21)라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그리스도의 부활에도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랑을 위해 죽는 것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살게 하시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려줍니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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