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94. 천국(「가톨릭 교회 교리서」 1023~1029항)
천국의 기쁨은 관계에서 온다 2003년 미국 유타주 블루 존 캐니언으로 가벼운 하이킹 등반을 떠났던 자신만만했던 청년 ‘아론 랠스톤’은 그만 호박돌을 잘못 짚었다가 돌과 함께 굴러떨어져 절벽 사이에 고립됩니다. 함께 굴러떨어진 호박돌에 오른손이 끼이게 된 것입니다. 다용도 칼로 자신의 팔을 짓누르는 돌을 긁어내 보지만, 칼만 무뎌질 뿐 돌은 그대로고 손은 빠지지 않습니다. 그는 음식과 물 없이 5일(127시간)을 버팁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할 지경까지 가서야 처음부터 생각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일을 감행합니다. 바로 칼로 자신의 팔을 잘라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무뎌진 칼로 정신을 잃지 않으며 손을 잘라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을 생각합니다. 애인도 있고 친구도 있고 가족도 있고 어머니도 계십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라면 팔을 자르는 아픔을 견딜 수 없었겠지만 자신 때문에 아파할 이들을 위해서 그 아픔을 감당해 보기로 합니다. 먼저 팔을 부러뜨린 다음 무딘 칼로 살과 힘줄을 자릅니다. 그리고 한쪽 팔을 남겨놓고 자신을 짓누르던 호박돌에서 벗어납니다. 그는 팔을 자르고 기쁨의 함성을 올립니다. 그 지옥과 같은 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돌아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은 천국이었습니다. 천국의 행복은 관계에서 기인합니다. 교회는 하느님과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친교를 이룰 수 있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합니다.(1028 참조) “성삼위와 동정 마리아와 천사들과 모든 복되신 분들과 함께하는 생명과 사랑의 이 친교를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천국은 모든 “인간의 궁극적 목적”(1024)입니다. 그 이유는 하느님과 이웃과의 친교가 완성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로 인한 불순종입니다. 우리 각자는 이 불순종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2015) 천국의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 살아 있는 자아가 또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그리스도와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 자아를 끊어내고 다시 에덴동산으로 향하는 과정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의 힘으로 만들어진 말씀의 칼로 자신과의 싸움을 해야만 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옥처럼 살다가 천국에 갑자기 들어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부터 하느님과 이웃과의 온전한 친교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성령을 통하여 이미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습니다. “천국은 그리스도와 온전히 한 몸이 된 모든 사람의 복된 공동체입니다.”(1026) 이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복된 친교의 완성은 마지막 때에서야 이루어지겠지만, 이미 천국의 행복은 교회를 통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하늘나라가 있습니다.”(1025)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은 교회에 충만하고 교회의 성사를 통해 신자들에게 전해집니다. 그러니 교회를 통해 성사에 참여하는 모든 이들은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천국의 행복을 맛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천국 시민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행복의 감정이 솟아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성령으로 부어지는 것처럼(로마 5,5 참조) 기쁨과 평화 또한 성령의 열매입니다.(갈라 5,22 참조) 바오로 사도는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1테살 5,19)라고 충고합니다. 이 세상에서 교회 안에 머물러도 하느님께 불순종하게 만드는 자기 자신을 버리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라는 천국의 열매는 맺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라고 권고하십니다. 마음에 행복한 감정이 사라지고 있을 때 동시에 성령의 불도 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령을 받고 있다면 또한 자신과의 싸움도 격렬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늘나라의 행복은 성령으로 자신을 이긴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과 이웃의 관계회복입니다. [가톨릭신문, 2020년 11월 15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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