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05.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정의란 무엇일까 (2) 사랑과 정의(「간추린 사회교리」 201항)
사랑 없는 법과 협상은 진정한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마리아: 신부님, 저번에 ‘정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너무 추상적이지 않나요? 금전이나 이익이 달린 현실적 이해관계 문제는 이웃 사랑보다는 법리나 원칙에 의해 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중범죄 같은 경우 쉽게 용서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엄격한 법이 필요한 거구요. 정의와 사랑은 구분돼야 하지 않을까요? 이신부: 함께 대화해 봐요! 정의와 사랑은 양립할 수 있을까? 지난 호에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정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며 그래서 의롭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물론 이것은 대전제입니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세부적인 법과 제도도 필요하지요. 취업을 위해선 정정당당한 경쟁 과정이 필요하고, 교육·재산·부동산과 같은 문제들은 합리적이고 공정한 사회 장치들이 필요합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그것을 선익을 위한 도구라고 말하며 인간존엄·생명·공동선을 위해 효과적으로 사용돼야 한다고 가르칩니다.(326, 371항 참조) 그런데 현실 속에서 사랑과 정의의 대립이 첨예하게 발생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분명 의로운 사람이 당하는 고난을 비롯해서, 가령 범죄 피해와 같은 큰 상처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형벌은 도덕적 속죄를 위한 것이고, 궁극적으로 용서를 지향하는 가운데 화해의 정의를 촉진한다”고 가르칩니다.(403항) 그러나 정서적으로 이를 실천하고 받아들이긴 쉽지 않습니다. 최근 강력 범죄자에게 기초생활보장금을 지원하지 말라는 국민 청원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현실에서 정의와 사랑은 양립하기 어려운 것일까요? 사랑과 정의는 서로를 완전하게 한다 소설 「레 미제라블」의 백미는 은식기를 훔쳐 달아나던 장발장에게 은촛대까지 주었던 미리엘 주교의 행동입니다. 결국 용서와 사랑이 그에게 새 삶을 주었고 그의 일생은 많은 사람에게 도움을 줍니다. 작품은 가혹한 처벌만을 우선시하며 교정의 여지를 주지 않았던 당시의 사법제도를 비판하며 각박한 세상에서 피어나는 관용과 사랑의 아름다움을 묘사합니다. 가톨릭교회는 정의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주관적인 기준에서, 정의가 다른 사람을 한 인격체로 인정하려는 의지에 바탕을 둔 행위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기준에서, 정의는 상호 주관적이고 사회적인 영역에 확고한 도덕 기준을 세우는 것이다.”(201항) 객관적 기준은 질서를 유지하는 법제도를 뜻하고 주관적 기준은 그의 허물에도 한 사람을 온전히 품으려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 두 가지는 수레의 양 바퀴와 같습니다. 어느 한 가지만 강조된다면 자칫 그 본연의 의미가 퇴색될 수 있습니다. 어느 하나만 중요한 게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고 서로가 서로를 증진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의와 사랑도 서로를 더 풍요롭게 합니다. 그 중에서도 가톨릭교회는 더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것을 사랑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 안에서의 정의 정의의 문제는 매순간 우리가 부딪쳐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간존엄, 사랑, 생명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너무 각박해 그 소중함을 체험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억울한 이들, 우는 이들, 상처로 괴로워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지만 분노와 미움에만 머문다면 더 잘못된 길로 빠질 수도 있고 더 많은 것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오직 사랑만이 인간을 본래 자기 모습대로 돌아가게 할 수 있기에 가톨릭교회는 정의를 사랑 안에서 바라봅니다.(203항) 인간과 사회는 정의만으로 다스려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랑이 없으면 어떠한 법이나 법체계, 협상도 일치와 형제애, 평화를 누리며 살게 해 줄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랑을 강조합니다.(207항) 여기에는 용기와 믿음이 요청됩니다. 비록 세상이 사랑이 아닌 미움을 외치고, 용서가 아닌 단죄를 소리 높인다 해도 그리스도인은 증오가 아닌 화해와 사랑을 증거해야 합니다. “사형제 존치 목소리는 흉악범에 대한 자기 분노 해소일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죽이는 것이 과연 답일까요? 목숨을 빼앗는 것은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답은 세상이 죽이라고 할 때도, 그들을 품어 안으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서울대교구 사회교정사목위원회 부위원장 김도훈 신부) [가톨릭신문, 2021년 1월 31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노동사목위원회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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