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11. 전체의 다양성과 신비의 단일성(「가톨릭 교회 교리서」 1200~1209항)
전례 토착화를 위한 신학자들의 역할 아일랜드에 가면 푸르른 들판에 묘지들이 보이는데 그 위에 세워진 독특한 모양의 십자가들을 보게 됩니다. 모든 십자가의 정중앙에 둥근 원이 있고, 이것을 ‘켈틱 십자가’라 부릅니다. 이 십자가는 ‘성 패트릭’으로부터 기인합니다. 성 패트릭이 아일랜드에 처음으로 신앙을 전할 때, 그들은 태양신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성 패트릭은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리신 그들이 섬겨오던 태양신으로 이해시켜야 했습니다. 태양신은 그리스도께로 가는 하나의 다리요, 비유였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그들이 섬겼던 바로 그 태양신은 아닐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성 패트릭의 토착화 노력으로 쉽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각 지역의 문화에 맞게 신학과 전례가 스며드는 것을 ‘전례의 토착화’라 할 수 있습니다. “전례의 거행은 각 민족의 특성과 문화에 부합해야” 하는데, 이런 이유로 전례 형식의 다양성이 초래될 수밖에 없습니다. 각 지역 교회들은 지리적, 문화적으로 다양한 특성들이 존재하기에, 각자의 “독특한 표현들”(1202)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에는 수많은 다양한 전례의 형태가 존재합니다. 동방교회는 물론이요, 가톨릭교회이면서도 아프리카 전례의 모습이 다르고 인도의 전례가 다릅니다. 심지어 같은 이탈리아지만 로마와 밀라노 전례가 다릅니다. 밀라노는 성 암브로시오가 만든 독특한 전례서를 따릅니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기념하는 것은 동일한 파스카의 신비”(1200)입니다. 각 지역에서 이해될 수 있는 독특한 표현들을 통하여 “사도전승”(1209)에 맞는 파스카 신비의 의미를 드러낸다면 전례의 다양성은 “전례의 풍요로움의 근원”(1206)이 됩니다. 하지만 이런 전례의 다양성이 교회 간의 “긴장과 상호 몰이해와 심지어 분열까지 일으킬 수도 있다”(1206)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토착화의 바람이 한창일 때, 일부 극단적인 사람들은 제의 대신 한복을 입고, 빵과 포도주 대신 떡과 막걸리를 사용하여 미사를 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제의’의 색과 모양 안에 이미 오랜 신학적 의미가 부여된 상태였고, ‘빵과 포도주’만큼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 열매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 이런 두려움 때문에 토착화시키지 못하고 전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매우 경직된 전례가 됩니다. 소위 ‘로마보다 더 로마 같은 전례’가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잎은 무성하지만, 신자들이 이해할 수 없어 믿음의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만드는 형식에만 치중하는 ‘저주받은 무화과나무’처럼 될 수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는 2000년 동안 이어온 전례를 개혁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신학자들의 공로가 컸습니다. 이전까지 전 세계에서는 라틴어로 미사가 진행되었습니다. 신자들은 알아들을 수 없으니 미사 하면서 묵주기도를 했습니다. 이 공의회로 인해 2000년 만에 자국어로 미사를 할 수 있게 된 감격이 컸지만, 우리는 그동안 왜 그것을 바꾸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반성해야 합니다. 사람의 몸은 약 50조 개의 세포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세포들은 약 7년이면 하나도 빠짐없이 새로운 세포로 다 바뀝니다. 그러나 세포가 다 바뀌었다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몸은 바뀌지만, 정신은 그대로입니다. 몸이 안 바뀌려고 하면 암이 되고, 정신이 바뀌려고 하면 정신병에 걸립니다. 정신은 유지하며 몸은 바뀌도록 해야만 모든 면에서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전례에서도 하느님께서 제정하신 “변경될 수 없는 부분”과 문화에 적응하기 위해 “변경할 수 있는 부분”(1205)을 명확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몫은 신학자들이 담당해야 합니다. 신학자들은 바뀌어야 할 것과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알아 구분하고 바뀌어야 할 것은 꼭 바꾸고 바뀌지 말아야 할 것은 끝까지 지켜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3월 21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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