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11. 가치에 대한 성찰 - 올바른 정의란 무엇일까 (8) 정의와 분배, 그리스도인의 책임(「간추린 사회교리」 40항)
정의를 위해 우리는 ‘형제적 사랑’을 나눠야 합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 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고(故) 노회찬 의원 ‘6411 버스를 아십니까?’) 6411번 버스로 상징되는 사회적 약자의 처지 고(故) 노회찬 의원을 통해 잘 알려진 6411 버스가 있습니다. 6411 버스는 꼭두새벽부터 청소노동자 분들을 태우는 버스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 최저임금과 열악한 처우, 힘들고 더러운 청소 일을 하는 애환을 우리 사회에 잘 알려 줬습니다. 대개는 고령, 저학력 그룹으로 고용 시장에서 경쟁이 부득이 어려운 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는 사회 구조적 어려움 즉, 경제여건·교육·태생적 환경의 기회 불평등 문제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금수저 흙수저 논란에서 볼 수 있듯 부와 가난은 개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며, 그래서 복지제도가 존재하고 현실에서 공정의 문제는 합리적 분배라는 대안을 요청합니다. 이에 대해 개인의 소유권과 재산이 중요하다는 자유지상주의(로버트 노직), 반대로 개인의 권리와 함께 평등을 중시하며 격차를 보완해야 한다는 복지국가형 자유주의(존 롤스), 지나친 능력 지상주의보다 연대 의식으로 건강한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공동체주의(마이클 샌델) 등이 제시됩니다. 모두 개인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핵심은 분배에 대한 논란입니다. 가톨릭이 제시하는 분배에 관한 생각 가톨릭 사회교리는 사유재산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인간존엄, 연대성, 공동선, 보조성, 재화의 선용과 약자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합니다. 또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부의 독점현상을 분명히 비판하고,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중시합니다. 이는 인간존엄, 황금이 우상이 됨에 대한 경계, 경제와 정의 모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데서 기인합니다. 분배에 대한 방법은 제도와 연관됩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는 어떤 제도가 좋다고 하기 이전에 그 제도에 담겨야 할 가치와 정신, 방향을 먼저 제시합니다. 그리고 경제·기술발전 등 급변하는 세상에서 인간이 어떤 존재가 돼야 하는가, 인간의 존재 의의는 무엇인가를 근원적으로 성찰하며 인간과 사회의 건강한 책임을 요청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16항) 즉 인간은 자신이 받은 재능과 재화, 역량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잘 관리해야 하는 사회적 책임이 있고(20항, 83항), 사회와 이웃에 대한 이런 책임이 하나의 소명이라고 가르칩니다.(40항) 정의를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 세계적으로 공정과 정의에 관한 관심이 높아져서일까요?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많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그 책의 원제목은 「Justice: What’s the right thing to do?」 그러니까 ‘무엇을 하는 것이 정의로운가?’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정의는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하는 복잡한 개념입니다. 개인의 정당한 노력, 공정한 기회, 합리적 보상, 투기나 불법행위에 대한 엄정한 대응, 공의로운 사법제도도 포함되나, 사랑과 형제애, 인간 본연의 역할, 삶의 궁극적 의미라는 가치들도 동시에 수반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러한 정의를 하느님, 사랑, 영성, 형제애와 함께 생각합니다. 그리고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쟁도 중요하지만, 그 정의를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행동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한 회심, 이웃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려는 노력이 그리스도인에게 시급히 요청됩니다. “샤를 드 푸코 복자는 하느님께 자신을 전적으로 봉헌하겠다는 지향에 따라 아프리카 사막 깊은 곳에 버려진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샤를 드 푸코 복자는 모든 인간을 형제로 느끼고 싶은 자신의 열망을 표명하며 벗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내가 참으로 이 나라에서 모든 영혼의 형제가 될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도해 주게나.’ 궁극적으로 그는 모든 이의 형제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과 동일시함으로써 비로소 모든 이의 형제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이러한 이상을 불러일으켜 주시길 빕니다. 아멘.”(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모든 형제들」 287항) [가톨릭신문, 2021년 3월 21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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