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교리 : 평화 증진 (4) 한반도의 평화 2018년 4월 25일, 저는 로마에서 공부를 마치기 전 마지막으로 교황님의 일반알현에 참여하고자 바티칸 광장에 갔습니다. 그런데 알현이 끝나갈 무렵, 귀가 번쩍 뜨이는 교황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번 금요일인 4월 27일 판문점에서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남북 정상회담이 열립니다. […] 평화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에게 저는 제 개인적인 기도와 더불어 교회 전체의 동반을 보장합니다.” 신앙인의 정체성 : 용서와 화해 하느님을 믿는 사람 중에 용서와 화해의 가치를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여러 차례 강조하셨기 때문입니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에 너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형제가 생각나거든 그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그를 찾아가 화해하고 나서 돌아와 예물을 드려라.”(마태 5,23-24)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2) 또한 십자가 죽음의 순간에서는 말씀만이 아니라 당신 존재 전체를 통해 용서와 화해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34) 그렇기 때문에 우리 역시도 이 어려운 길을 가고자 노력합니다. 손톱만 한 생채기를 주고받는 것으로도 갈라서는 사람이 많은 세상입니다만,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으려 의지적으로 노력합니다. 고해성사를 보면서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신앙인이 개인적인 일에서는 용서와 화해를 위해 노력하지만, 유독 이러한 작동 기제가 멈추는 분야가 있습니다. 바로 대북 문제입니다. 지난 70년간의 상처와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북한의 태도에서 용서와 화해에 대한 의지 대신에 미움과 분노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한민족, 한반도의 모습으로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하느님의 기준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신앙이지 그 반대가 될 수 없습니다. 자신의 기준에 하느님께서 맞추시라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니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때도, 신앙인이라면 항상 하느님의 시각을 고민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지금의 이 상황을 어떻게 보실지, 예수님께서 이 현장에 계셨다면 어떻게 행동하실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한민족이 서로 총을 겨누고 용서 대신 증오를 반복하는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요? 이 땅의 신앙인들에게 무엇을 바라실까요? 우리는 하느님을 믿기 때문에 용서와 사랑이라는 어려운 길을 걸어갑니다. 그분께서는 신앙인이 평화의 도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구원계획에서 벗어난 이들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함께 기억합시다. “우리 아버지 하느님의 은총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베풀어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용서를 받은 우리는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평화를 전하고자 길을 나설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생각과 말을 이끄시어 우리가 정의와 평화의 장인이 되게 해 주십니다. 평화의 하느님, 저희에게 강복하시고 저희의 도움이 되어 주소서.”(교황 프란치스코, 「2020년 세계 평화의 날 담화」) [2021년 3월 28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의정부주보 5면, 김승연 프란치스코 신부(수동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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