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13. 세례성사 ① (「가톨릭 교회 교리서」 1212~1216항)
세례는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삶의 시작 칠성사 중 ‘세례-견진-성체’의 세 성사를 특별히 ‘입문 성사’라 부릅니다. 사람이 태어나고(세례) 성장하고(견진) 이를 위해 먹고 마시는(성체) 것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연적 생명의 기원(세례), 성장(견진), 유지(성체)”(1212)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고 교회의 일원으로 ‘입문’하게 됩니다. 이 세 성사 중에 ‘세례성사’부터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하느님 자녀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우리가 받는 세례는 단순히 물을 이마에 뿌리는 예식이 아닙니다. 교리서는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교회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그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1213)라고 말합니다.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면, 이는 분명 세례를 받는 사람이 그 예식을 통해 실제적인 삶의 전환을 위한 결단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나로 사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사는 삶의 결단이 곧 세례입니다.(갈라 2,20) ‘안톤 룰릭’ 신부는 서품을 받은 해 12월 19일, 공산정권에 의해 17년간은 감옥에, 그 후 다음 17년간은 노동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의 첫 번째 감옥은 몹시 추운 외딴 산골 마을의 한 작은 화장실이었습니다. 그곳에서 9개월간 누울 수도, 다리를 펼 수도 없는 상태로 인분 위에 앉아있어야 했습니다. 그해 성탄절 밤에 간수들은 그를 다른 화장실로 끌고 가서 옷을 벗기고 밧줄에 묶어 매달았습니다. 조금씩 혹독한 냉기가 전신을 휘감았고 심장은 곧 멈출 것만 같았습니다. 룰릭 신부는 엄청난 절망감으로 크게 소리를 내어 울었습니다. 그러자 간수들이 달려와 그를 바닥에 내려놓고 마구 구타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밤, 그 더럽고 혹독한 고통 속에서 룰릭 신부는 예수님의 강생과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자신을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를 극심한 고통 중에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알 수 없는 위로가 느껴졌고, 심지어 마음 깊이 신비로운 기쁨이 차올랐습니다. 신부는 고문자들에게 어떤 미움도 느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또 1989년 79세의 나이로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신부는 우연히 만난 자신을 고문하던 간수에게로 달려가 그를 진심으로 껴안았습니다. 그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해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출처 김영석 신부(예수회) ‘안톤 룰릭 SJ 신부 이야기’, 기도의 사도직 카페) 세례는 그리스도와의 본격적 만남입니다. 어떤 그리스도냐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가 자기를 낳기 위해 피를 흘린 엄마를 처음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전의 엄마 뱃속에서의 삶과는 아주 다른 삶을 시작해야 하기에 무척 두렵지만, 그 고통 가운데서도 엄마가 함께한다는 안도감과 기쁨이 있습니다. 안톤 신부님도 그 고통 가운데서 진정으로 예수님을 만나 그분 사랑의 소명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전에 자신을 얽매던 “죄에서 해방되어 하느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납니다.”(1213) 세례의 참된 효과가 발휘되려면 이렇듯 자신이 잠기는 그 물이 곧 “그리스도의 피”요 “성령의 은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안톤 신부님이 고문을 당할 때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 당하신 고통을 체험한 것과 같습니다. 우리 불만과 미움의 죄는 그분의 피에 잠겨 죽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준다”(baptizein)라는 말이 “물에 잠기게 하다”(1214)라는 뜻입니다. “바닷물은 십자가의 신비를 상징”(1220)하는데, 마치 이전의 내가 파라오의 군대처럼 그 바다에 잠기는 것입니다. 이전의 내가 죽고 그리스도를 닮은 나로 새로 태어남이 곧 세례입니다. 따라서 “성령에 의한 재생과 경신의 목욕(티토 3,5)”(1215)인 세례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요한 3,5)”(1215) 안톤 신부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만나서 그러했듯, 세례를 받은 신자도 사랑이라는 “하느님 주권에 대한 표징”(1216)을 지니고 살게 됩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로 사는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가톨릭신문, 2021년 4월 4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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