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24. 성체성사 ②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33~1336항)
음식인 빵과 포도주가 생명의 양식이 되는 원리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1324) 우리는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를 거쳐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과 같습니다. 이때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와 ‘바위에서 솟아나는 물’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양식과 음료가 없었다면 광야에서 생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광야에서 먹은 만나에 대한 기억은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말씀의 빵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늘 상기하게 합니다.”(1334)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으로 가는 여정은 우리가 쫓겨났던 에덴동산으로 다시 돌아가는 신앙생활의 상징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첫 조상은 하느님의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으려 했기에 죄를 짓고 쫓겨났습니다. 생명을 자기 힘으로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는 상대방에게 죄의 책임을 전가하여 관계가 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에덴동산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하느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다시 선악과를 봉헌해 드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봉헌’ 때에 빵과 포도주에 대하여 창조주께 감사를 드립니다.”(1333)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봉헌으로 인정해드리면 주님께서도 생명의 양식을 주시며 우리를 당신 자녀로 인정해주십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힘으로 살려고 먹으려 했던 것은 ‘음식’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인정할 때 주시는 음식을 ‘양식’이라 합니다. 여기서 ‘음식’과 ‘양식’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모기나 기생충이 먹는 것은 양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는 주는 이의 사랑이 담겨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원숭이와 같은 고등동물은 어미의 사랑이 담긴 양식을 먹습니다. 새끼들은 그 양식을 먹으며 어미의 공동체에 속할 수 있게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를 자신들의 세상으로 부르는 ‘초대장’과 같습니다. 양식을 먹지 못한 동물은 무리로 생활할 수 없습니다. 어떠한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는 그 ‘공동체가 요구하는 사랑의 수준’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부모에게서 오는 양식을 통해 받지 않으면 할 수 없습니다. 1990년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어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을 주는 이의 사랑을 먹지 못하면 마치 부모를 잃은 아이처럼 이 세상을 자기 힘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생존경쟁이 펼쳐지는 ‘정글’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며 자기 생존을 위해 이용하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랑이란 것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양식을 먹어 생존이 보장받을 때만 가능해집니다. 뱀에 물려 죽을 상황이 되면 뱀이 밉겠지만 그것이 생명에 위협이 되지 않을 때는 미워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근원적 요소는 생존 욕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순교자들은 자신의 생명을 빼앗는 이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에서 오는 생명의 양식으로 영원한 생명을 보장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생명의 주인이신 아버지가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먹고 하늘 나라 백성으로 먼저 인정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적인 음식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말씀의 빵”(1334)으로 살고, “축복의 잔”(1코린 10,16)을 마심으로써 성령의 기쁨에 취합니다. 카나 혼인 잔치에서의 포도주는 생명의 음료인데, 이 기적 자체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피로 변한 새로운 포도주를 마시게 될 하느님 나라 혼인 잔치의 실현을 나타냅니다.”(1335) 이렇듯 생명의 양식으로 오시는 성령께서는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초대하고 계심을 믿게 합니다. 영원한 생명의 보증인 이 양식은 두려움 없이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기에 하느님 나라 공동체에 살 수 있는 자격을 얻게 합니다. 그것을 먹고 마시는 이마다 새로운 정체성이 생겨 하느님 자녀만이 실천할 수 있는 사랑의 계명을 완성하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6월 20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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