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26. 성체성사 ④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45~1347항)
미사의 핵심 구조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그리고 ‘예물 봉헌’ ‘미사의 구조’에 대해 말할 때 우선 크게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는 두 가지의 다른 전례적 측면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예배 행위”(1346)를 이룹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하기 위해 베푸는 가장 중요한 두 요소는 ‘가르침과 양식’입니다. ‘가르침’은 말과 모범으로 하는 교육이라 할 수 있고 ‘양식’은 음식을 내어주는 사랑의 표현입니다. ‘가르침’이 말씀의 전례와 같고 ‘양식’을 주는 것이 성찬의 전례와 같습니다. 가르치기만 하고 양식을 안 줄 수 없고, 양식만 주며 말로 가르치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가르침’과 ‘양식’은 모양은 다르지만, 자녀의 성장을 위한 부모의 같은 ‘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유튜브 동영상 가운데 ‘하늘 같은 든든함, 아버지’가 있습니다. 몰래 카메라인데 매우 감동적입니다. 우선 어린 자녀들을 둔 젊은 아버지들에게 자녀에 대해 질문하는 설문지를 작성하게 합니다. 지갑에 자녀의 사진을 몇 장 가지고 있고 하루에 자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몇 번이나 하며 잠자는 자녀의 모습을 지켜본 적은 있느냐는 등의 질문입니다. 아버지들은 입에 미소를 머금고 설문지에 답합니다. 그러다 질문이 바뀝니다. 똑같은 질문인데 자기 ‘아버지’ 사진은 몇 장이나 가졌는지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은 마지막으로 언제 했는지 아버지의 주무시는 모습을 지켜본 적 있는지 등의 질문입니다. 젊은 아버지들은 난처해합니다. 자기 자녀에게 가지는 마음과 비교하면 아버지에게는 너무도 무심했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때 미리 녹화해 놓았던 그들 각자 아버지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아버지들은 하나같이 아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에 미안한 마음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아버지들은 자신들에게 미안해하는 아버지께 더 미안해합니다. 부모의 은혜로 자랐지만, 부모를 알려는 마음은 너무도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들어와 우는 아들을 안아줍니다. 이처럼 사람은 부모의 사랑에 대해 더 깨닫고 감사하며 더 성장합니다.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는 주님을 더 알고자 하는 말씀의 전례로 완성됩니다. 말씀의 전례는 성찬 전례의 의미를 깨닫고 더 감사하게 만듦으로써 둘은 궁극적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런데 만약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의 ‘균형’이 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개신교는 말씀의 전례에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말씀 전례만 지나치게 강조하면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의무’만 강조되어 주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내어주실 수 있는 자비로운 분임을 잊습니다. 그래서 성찬의 전례가 약해집니다. 반면 가톨릭교회는 개신교의 반작용으로 말씀 전례보다 성찬의 전례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내어주시는 주님께 대한 감사의 의무가 약해지면 성체성사의 의미도 퇴색할 수 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당연한 듯이 받아들이면 성체를 영하면서도 세속적인 것만을 청하는 기복신앙으로 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둘의 균형을 잡아주는 ‘감사의 봉헌’이 필요합니다. 감사의 봉헌은 말씀의 전례를 통해 성찬 전례의 의미를 깊이 깨달았다는 표징이 됩니다. 이런 의미로 아브라함이 자신에게 축복을 주기 위해 “빵과 포도주”(창세 14,18)를 들고 온 대사제 멜키체덱에게 자신 소유의 “십 분의 일”(창세 14,20)을 바칩니다. 미사 때 “제물을 제대에 바치는 것은 멜키체덱의 행위”(1350)를 반복하는 것입니다. 성찬례의 가장 오래된 기록에서 유스티노 성인은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사도들의 기록과 예언자들의 글을 읽습니다”(1345)라고 말합니다. “다음에 형제들의 모임을 주재하는 사람에게 빵과, 물과 포도주를 섞은 잔을 가져다줍니다.”라고 씁니다. 말씀의 전례에 이은 예물 봉헌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이 선물들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으로 뽑힌 데 대하여 오랫동안 감사(eucharistia)”(1345)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이 감사의 봉헌이 곧 ‘성체성사’(eucharistia)로 이어집니다. 말씀의 전례를 통해 주님 은혜를 더 알아야 감사할 수 있고, 감사하면 ‘봉헌’하게 되는데, 이것이 성체성사에 대한 더 깊은 신심이 생기게 만듭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4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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