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27. 올바른 행동에 대한 성찰 (4) 공정논란, 경쟁과 돌봄에 대한 우리 인식도 변해야(「간추린 사회교리」 165항)
구성원들의 양심과 욕심이 구별될 때 사회는 건강해진다 마리아: 신부님 전세 기간이 끝나가서 저희 이사 가요. 주택청약추첨에서 또 떨어졌어요. 저번에는 물량이 없어서 안 되더니 이번에는 자녀가 없다고 또 떨어졌어요. 벌써 10년도 넘었는데 청약은 희망이 없는 것 같아요. 집값은 비싸고 어디로 가야할지. 베드로: 사회초년생이나 1인 가구도 주택청약에서 제외돼요. 이건 너무 불공평해요! 바오로: 재난지원금도 마찬가지예요. 왜 소득 하위 80%만 주는 거죠? 나머지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 아닌가요? 이건 불공평해요! 이 신부: 함께 이야기 나눠 봐요! 공정함에 대하여 공정에 대한 논란이 뜨겁습니다. 전통적으로 한쪽에서는 결과와 경쟁, 능력에 무게를 두고, 다른 쪽에서는 분배와 돌봄을 강조합니다. 양자가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하겠지만 입장 차이와 갈등도 불가피합니다. 각박해진 세상살이 속에서 많은 이들이 박탈감, 상실감을 느끼고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까요? 공정을 둘러싼 논쟁이 매우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벌써 작년 일인데요, 인천공항 정규직 전환 사건이 사회적 갈등으로 번졌습니다. 많은 취업준비생들은 공항의 정규직 전환을 반대했고, 동일한 노동을 하면서도 불합리한 처우를 받았던 비정규직 종사자들의 의견이 공항 측과 충돌한 것입니다. 취업뿐만 아니라 입시와 진학, 주택청약과 납세 등 모든 분야에서 공정에 대한 논란은 끊이지 않습니다. 게다가 정책과 제도의 허점, 정권과 위정자들의 과실이 빚어낸 결과가 그런 현실을 더 아프게 합니다. 경쟁과 돌봄 모두 건강하게 작동해야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경쟁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나 경쟁만 있어서는 곤란하겠죠. 돌봄도 작동해야 하고 결국 이 두 가지는 공존해야 합니다. 관건은 그것들이 일상과 삶의 자리에서 적절하게 제 기능을 하느냐입니다. 불평등이 심각하다면 공정한 경쟁은 불가능합니다. 공정한 경쟁이 되도록 해야겠지요. 돌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체는 아름다운 것이나 만일 남발되면 본래의 목적이 변질돼 부작용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경쟁과 돌봄 모두 도덕이나 윤리성을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한정된 자원을 두고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지만, 경쟁과 돌봄 모두 올바르게 작동해야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나보다 약한 이에 대한 돌봄은 사회의 바탕이 돼야 합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힘든 현실에서 누군가를 돌볼 여력은 고사하고 나 하나를 건사할 형편도 안 되기 때문에 갈등이 커집니다. 가톨릭교회는 공정에 대해 정당한 배분과 최소한의 인간적 권리를 핵심으로 언급합니다.(「간추린 사회교리」 201항) 하지만 이런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이해관계를 명확히 조정하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제도와 정책은 한계가 있고, 사람은 누구나 더 좋고 편안한 것을 누리고 싶어 하는 반면 이익을 포기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왜 신앙이 중요한가? 사회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도와 정책의 개선이 중요합니다. 공정하면서도 실효성 있는 정책이 실행돼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 변화도 필수입니다. 더욱이 욕심을 식별하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실 공정논란의 어려움은 논쟁 그 자체보다 이해관계와 입장 차이에서 비롯되는 분열과 적대적 반목에 있습니다. 또한 현실적 이익과 재물 등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현 세태에도 원인이 있고요. 그리고 이런 악순환이 반복됩니다. 분명한 것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를 추구할 때 우리는 공정논란에 숨어 있는 적대적 논쟁을 멈출 수 있습니다. 이런 얘기가 수십 년 넘게 성실히 일해도 내 집 하나 마련 못하는 분들, 일자리 못 구하는 청년들, 외로움에 고생하시는 어르신들, 수많은 이웃들에게 참 송구합니다. 그런 분들에게는 먼저 물심양면으로 국가와 사회, 종교나 이웃이 도움이 돼 드려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과 욕심의 구별, 나보다 더 어려운 이에 대한 배려, 사랑과 나눔을 지향하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언제나 요청됩니다. 또한 재물이나 현세적 욕심보다 하느님을 추구할 때 사람과 사회는 건강해지고 평화로워집니다. “언제나 모든 차원에서 인간에게 봉사하기를 바라고 또 이를 지향하는 사회는 공동선, 곧 모든 인간과 전(全) 인간의 선을 그 으뜸 목표로 삼는 사회이다.(「간추린 사회교리」 165항)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11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