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28. 성체성사 ⑥ (「가톨릭 교회 교리서」 1356~1361항)
성찬례는 머리이신 주님을 모시는 시간… 무엇보다 ‘감사’를 의미 교리서는 성찬례를 ‘기념’과 ‘현존’, 그리고 ‘감사’의 세 단어로 종합합니다. 우선 성찬례는 “그리스도의 파스카를 기념하는 것”(1365)이므로 ‘기념’입니다. 파스카는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그 고기를 집 안에서 먹는 예식입니다.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탈출하여 모세와 하나가 되는 사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이 기념 제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새로운 아담으로서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콜로 1,18)로 현존하십니다. 우리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때문에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의미”(1360)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머리였던 ‘자아’(ego)라는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새로운 머리가 되시어 우리를 해방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미사 때 감사와 찬미가 솟아나지 않는 이유는 주님을 머리이며, 주님으로 모시기 위해 십자가에 봉헌되는, 이전 머리인 우리 자신을 너무도 아까워하기 때문입니다. 여기 자아라는 폭군에서 벗어나지 못해 극단적인 고통을 겪어야만 했던 한 인물을 소개합니다. ‘아른힐 레우뱅’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저서 「나는 자주 죽고 싶었고, 가끔 정말 살고 싶었다」에서 어떻게 자아의 폭력에 휘둘려 조현병까지 가게 되었는지 상세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른힐은 10대 소녀 시절 ‘나는 누구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선장’의 명확한 목소리를 듣습니다. 이 선장이 ‘자아’입니다. 아른힐은 이 선장을 ‘머리’요 ‘주인’이요 ‘나’로 삼았습니다. 선장은 아른힐이 다시는 혼자가 되도록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아른힐은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해준 선장을 고마워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부터 선장의 폭력이 시작되었습니다. 한 번은 “숙제를 조금 더 하는 게 좋겠다”라고 선장이 말했습니다. 그러면 아른힐은 숙제를 한 번 더 했고, 선장은 “아직도 별로인데?”라고 말합니다. 아른힐은 숙제를 다시 했고 더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만족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아직이야. 넌 진짜 멍청하구나. 내가 옆에서 도와주기에 망정이지. 한 번 더 해.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하라고.” 하지만 더는 무리였습니다. 새벽 4시였고 세 번을 다시 하다 보니 심신이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 숙제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선장은 말했습니다. “너는 멍청한 데다가 게으르기까지 해.” 선장은 아른힐의 뺨을 몇 차례 때렸습니다. 학교 화장실에서도 손찌검했습니다. 물건으로 때릴 때도 있었습니다. 아른힐은 분명 자신의 손으로 자신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아른힐은 정신병원 독방에 갇히게 되었고, 지독한 공허감에 벽지까지 뜯어먹었습니다. 자주 자해하고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선장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끌어 주는 주님이요, 머리요, 선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악독한 선장에게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새 ‘머리’를 찾는 것입니다. 감사하면 그 감사한 대상에게 순종하게 됩니다. 감사하는 대상이 ‘머리’요 ‘나’요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받은 것에 감사했다면 선악과까지 차지하라는 뱀의 꼬임에 빠질 수 없었습니다. 성찬례는 각자 파라오의 종살이를 하는 우리 모두를 그 파라오의 압제로부터 탈출시켜주는 파스카의 재현입니다. 미사 때 이 신비가 재현됩니다. 다윗은 주님의 계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실 때 벌거벗고 춤을 추며 찬미하였습니다. 계약궤를 모시는 것은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성찬례와 같습니다. 이때 자기를 버리고 낮출수록 찬미가 솟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낮추는 것을 비웃던 아내 미칼에게 “나는 이보다 더 자신을 낮추고, 내가 보기에도 천하게 될 것이오”(2사무 6,22)라고 말합니다. 주님 앞에 우리가 무언가 요구할 수 있는 사람처럼 근엄하게 앉아있어서는 안 됩니다. “성찬례는 무엇보다도 ‘감사’를 의미합니다.”(1360) 다윗이 자신의 머리가 되실 주님께 알몸을 드러내고 찬미했다면, 자아의 종살이에서 구해주시어 자아의 종이 아닌 하느님의 자녀로 우리를 높여주신 주님께 얼마나 더 큰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까요? [가톨릭신문, 2021년 7월 18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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