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33. 올바른 행동에 대한 성찰 (10) 사회교리의 원천인 사랑(「간추린 사회교리」 3항)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참 형제자매로 만드는 사랑 빛을 보기 위해 눈이 있고, 소리를 듣기 위해 귀가 있듯이, 너희들은 시간을 느끼기 위해 가슴을 갖고 있단다. 가슴으로 느끼지 않은 시간은 모두 없어져 버리지. 장님에게 무지개의 고운 빛깔이 보이지 않고, 귀머거리에게 아름다운 새의 노랫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같지. 허나 슬프게도 이 세상에는 쿵쿵 뛰고 있는데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눈 멀고 귀 먹은 가슴들이 수두룩하단다. (미하엘 엔데 「모모」 중 ‘호라 박사가 모모에게’) 바쁨과 한가함 사이에서 “내일이 벌써 월요일이야!” 꼬박꼬박 출퇴근하다 보니 직장인들의 이런 비명에 저도 공감하는 요즘입니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은 힘들게 마련이죠. 한가로운 휴가를 상상하지만 동시에 쏜살같이 지나버린 시간이 아쉽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와 나의 삶이 허무하게 소모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나는 정말 행복한가? 기쁜가?’ 삶의 의미와 행복을 되묻게 됩니다. 마치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 신사들이 우리의 시간을 훔쳐 가듯 말이죠? 한가함이 영혼 구원의 원수라고 베네딕토 성인께서 말씀하셨지만 지나친 분주함은 오히려 우리를 지치고 힘들게 하고 자칫 더 소중하고 중요한 걸 잃어버리게 한다는 느낌도 듭니다. 가족과 친구, 사람과 이웃, 따스함과 소통, 존중과 배려, 나눔과 함께함, 바쁘고 힘들 때 잃어버리는 대표적인 것들입니다. 결국 정말 행복한지, 기쁜지를 가늠하는 기준은, 바로 ‘그러한 요소들을 얼마나 온전히 갖고 있는가’와 ‘그 안에 사랑이 있는지’입니다. 사회교리의 원천, 바로 사랑! 잠시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해 볼까요? 사랑도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삶에 녹아 있지요? 가족의 정과 친구 간 우정, 사람 간의 온정부터 이웃에 대한 연민 모두가 사랑입니다. 타인과 형성하는 협력, 상황을 공감하는 능력과 위기를 이겨내는 용기도 사랑과 연관됩니다. 분명한 건 그 사랑이 없을 때 삶은 생기와 빛을 잃어버립니다. 없던 길도 만들고 죽은 사람도 일으키는 게 바로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의 원천은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래서 「간추린 사회교리」 3항에서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회교리는 온전하고 완전한 구원에 대한 믿음, 충만한 정의에 대한 바람,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참 형제자매로 만드는 사랑에서 흘러나오며 이는 세상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아울러 그 사랑 덕분에 그리스도인과 교회 공동체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 되며(19항) 인류의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이 경이롭게 드러났다고 합니다.(21항) 하느님을 따르기로 한 우리의 마음은 바로 그 사랑에 대한 응답이며(22항)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가 사랑을 체험하는 여정입니다. 요컨대 세상을 마주하며 여러 상황을 식별하고 행동하는 지침을 선사하는 원천인 사회교리의 핵심도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 안의 사랑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해야! 불과 몇 개월 전까지 노동사목 소임을 하면서 각박한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곳을 떠나 느끼는 것은 우리 삶이 바로 현장이라는 것입니다. 모든 곳에 희로애락과 갈등이 있게 마련이듯 그 자리에서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사회교리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교리는 단순히 앎만으로 실천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삶을 슬기롭게 가꾸고 어려움에 대처합니다. 대화, 협력, 양보와 배려를 비롯해서 인내와 겸손, 지혜와 용기, 의지, 믿음과 희망 그 모든 것은 사랑과 결합돼야 합니다. 이런 사랑을 어떻게 형성하고 어떻게 간직해야 합니까? 우리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참 사랑은 오직 하느님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고, 미사에 참례하고 성찰과 침묵 속에서 신앙을 키워가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과 함께 머물러야 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도 함께 보며 우리 삶의 중심이 바로 하느님과 사랑임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하느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제물로 삼으시기까지 하셨습니다.”(1요한 4,10) [가톨릭신문, 2021년 8월 29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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