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35. 고해성사 ② (「가톨릭 교회 교리서」 1427~1439항)
죄는 두려움이 아닌 자비로 극복된다 까치 한 마리가 뜰로 날아왔습니다. 치매가 있는 백발노인인 아버지가 아들에게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까치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조금 있다가 다시 “얘야! 저 새가 무슨 새냐?”라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까치라니까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밖을 바라보시더니 또 같은 것을 물었습니다. 아들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까치요, 까치라고요!”라고 했습니다. 그때 옆에서 듣던 어머니가 한숨을 쉬고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범아! 너는 어렸을 때 저게 무슨 새냐고 백번도 더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까치란다, 까치란다’라고 하면서 말을 배우는 네가 귀여워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셨지. 그래서 네가 말을 배울 수 있었던 거다.” 만약 고해소에서 같은 죄를 여러 번 고백하면 사제는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죄를 용서받으면서 너무하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가 하느님보다 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목소리에 섞이게 되고 그러면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두려워하게 됩니다. 두려우면 시도하지 않게 되고 그러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엄마!”라는 말을 하기 위해서 아기들은 수천, 수만 번 연습한다고 합니다. 그때 말 좀 제대로 하라는 짜증 섞인 부모의 말을 들으면 아기들은 수치심을 느끼고 더는 노력하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아기가 말을 배우는 게 더뎌지고 그 고통은 부모가 함께 받게 됩니다. 고해성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칫 은총의 도구가 오히려 죄와 싸울 용기를 잃게 만들고, 신자들을 교회에서 떠나게 하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2)에서 아들이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자녀를 어떤 기분으로 맞이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아버지는 맏이가 화를 내는 것을 보며, “너의 저 아우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다. 그러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라고 말합니다. “이 비유의 중심인물은 ‘자비로운 아버지’”(1439)입니다. 되돌아온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기쁨’이 아들을 진정으로 죄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자비를 의심했다면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잘못을 비난하지 않고 단순하게 기뻐합니다. 모든 ‘성사’의 목적은 ‘본성의 변화’에 있습니다. 본성의 변화란 늑대라고 믿던 아이가 인간임을 알게 되어 두 발로 걷게 되거나, 인간인 줄 알았던 베드로가 물 위를 걷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욕망으로 이 세상에 빚어진 멸망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2베드 1,4) 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은 무디고 완고합니다.” 이 과정에서 자주 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넘어질 때마다 “하느님께서 새 마음을 주셔야 합니다.”(1432) 새 마음은 새 용기를 뜻할 것입니다. 고해성사는 믿음과 희망과 용기를 줍니다. 그렇게 넘어지고 일어서는 과정을 반복하며 죄 안 짓는 본성으로 성장합니다. 부담스럽지 않아야 빨리 두 발로 걸을 수 있습니다. 죄를 고백하는 것 안에서 수치심을 느끼게 해서는 안 됩니다. 넘어지는 게 두려우면 서는 것을 배울 수 없습니다. 본성의 변화를 위해 고해성사는 성체성사를 지향합니다. “일상적인 회개와 참회는 성체성사가 그 원천이며 양식입니다.”(1436) 부모가 주는 양식은 자녀에게 다시 일어설 힘과 용기를 줍니다. 하느님 자녀는 양식을 받아먹으며 “인간의 마음은 죄로 찔리신 그분을 바라봄으로써”(1432) “구원에 유익한 고통과 슬픔”(1431)을 안고 다시 죄와 싸울 “새 마음”(1432)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야 ‘습관’이 형성되고 그것이 ‘덕’이 되면 덕이 결국엔 ‘본성’이 됩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아빠를 “아바”로 발음한 아기에게 기쁜 마음으로 “괜찮아, 잘했어. 밥 먹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이 아닌 자비만이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이를 위해 고해소의 사제는 언제나 넘어져 기가 꺾인 자녀를 다시 일으켜 밥을 먹게 만드는 무한한 자비를 지닌 아버지의 표상이어야 합니다. [가톨릭신문, 2021년 9월 12일, 전삼용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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