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 - 세상의 빛] 135. 복음과 사회교리 (1) 성장과 변화의 원천인 복음(「간추린 사회교리」 86항)
신앙은 혁신과 창의성을 키우는 누룩이다 피에르 신부가 그에게 이야기했다. “당신은 정말 끔찍하게도 불행한 사람이구려. 나는 당신에게 줄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오. 있는 것이라고는 빚밖에 없소. 그리고 고국에 돌아와도 반겨줄 사람 하나 없는 당신 역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지금 죽을 생각만 하고 있소. 그런 당신에게 부탁 하나 하리다. 도움을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날 도와줄 생각은 없소?” 그가 바로 엠마우스 최초의 동료가 될 조르주였다.(아베 피에르 신부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중 ‘피에르 신부가 조르주에게’) 고단한 현실을 마주하며 ‘더 쉬운 사회교리 해설-세상의 빛’ 원고를 쓰면서 고민될 때가 많습니다. 사회 현안을 이야기하며 필요한 해법을 언급하지만, 해결을 위해서는 여전히 어려움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회의 많은 대립과 갈등, 한정된 재화를 둘러싼 긴장들은 결국 구성원인 우리의 성숙한 인격과 노력을 필요로 합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이 그리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하나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터지고 끝도 없어 보입니다. 세상은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대상이며 하느님의 구원은 이 세상에 실존하나 끝없는 싸움과 분쟁, 소외와 가난도 끝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일까요? 결국 문명의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성취는 상대적이고 잠정적일 뿐이기에 사도 바오로는 우리가 바라보는 세상은 사라지고 말 것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1코린 7,31) 또한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만,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요한 17,14-16), 인간 역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그 세상에 조종받아서는 안 된다고 사회교리에서도 이야기합니다.(48항) 그러나 이처럼 인간의 전문가인 주님의 교회는 인간의 한계와 불안을 잘 알기에 오히려 역사와 사회에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61항) 과연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신앙은 혁신과 창의성을 키우는 누룩 “신앙은 변화하는 사회적 정치적 현실들을 일정한 틀 안에 가두어두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신앙은 혁신과 창의성을 키우는 누룩이다. 언제나 이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 가르침은 현세의 변천하는 상황에 대처하여 쇄신의 원천인 복음에서 자극을 받아 계속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간추린 사회교리」 86항) 86항에서 신앙은 창의성을 키우는 누룩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실망을 안기는 세상에 대처하는 방법이 바로 복음이라는 점이 언급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적 한계 때문에 언제나 틀에 갇힙니다. 마치 감옥 속에서 푸념하듯이 우리는 불평하고 포기하며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 새로운 생각과 영감, 살아갈 힘을 얻는 원천이 바로 신앙과 복음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인간의 활동을 위기에 빠뜨리게 하는 것은 신앙과 복음을 멀리하는 우리의 지나친 자기애와 오만함이며(44항) 이는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를 통해 얻는 가장 중요한 신앙의 교훈이기도 합니다. 죄와 무력감의 가장 큰 뿌리인 교만함이지요. 성장과 변화의 원천, 복음 뭐든 열심히 하다 보면 고되기 마련입니다. 이웃과 사회에 좋은 영향을 미치려는 신앙인의 노력, 선행과 자선, 관심과 인내, 모든 활동도 자연스레 고갈되고 소진되게 마련입니다. 이에 대한 가장 적절한 처방은 시간을 내어 기도하고 복음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평생을 이웃을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훌륭한 분들, 김수환 추기경님, 마더 데레사 수녀님 같은 분들이 활동 속에서 기도를 빠뜨리지 않았다는 일화가 참으로 공감이 갑니다. 기도를 통해 새로운 힘과 의욕을 얻고 다시금 주님의 일을 해 나가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복음을 향한 신앙의 선물은 이에 그치지 않습니다. 복음을 통해 얻어지는 귀한 선물 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막다른 길과 같은 막막함, 절망과 어둠 속에서 해야 할 새로운 일을, 걸어야 할 길을 만들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신앙을 통해 하느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그로부터 15년 후 조르주는 죽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신부님, 당신이 만일 내게 직업이라든지 빵, 집, 돈을 주려고 했다면 아마 나는 다시 자살을 시도했을 거예요. 그때 내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어떤 게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였으니까요.”(아베 피에르 신부 「이웃의 가난은 나의 수치입니다」 중 ‘조르주가 피에르 신부에게’) [가톨릭신문, 2021년 9월 12일, 이주형 신부(서울대교구 사목국 성서못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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