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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유익한 교리여행24: 여행지 - 한국 교회사 (3)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1-09-20 조회수1,726 추천수0

[떠나자! 파울리타 수녀의 유익한 교리여행] (24) 여행지 : 한국 교회사 3

 

 

- 103위 한국 순교 성인화.

 

 

코로나19로 해외 성지 순례가 어렵게 되었지만, 다행히 국내 성지 순례는 소규모로 행해지고 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을 맞아 성지 관련 여러 책자 또는 성지를 소개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서 성지에 대해 공부를 하거나, 직접 방문해 순교 선조가 간직한 믿음을 마음에 새기고 돌아와 힘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올해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맞아 신부님과 관련된 성지(솔뫼, 골배마실, 제물진두, 용수, 나바위, 은이, 새남터, 미리내 등)를 방문해 전대사의 은총을 받고 천주교인에 대한 나의 정체성을 깊게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럼 세 번째 한국 교회사 퀴즈 여행을 떠나볼까요?

 

 

퀴즈여행

 

1. 한국 성인 중에서 평신도들의 대표자는?

2. 우리나라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가 순교한 장소는?

3. 12년간 사목하다가 과로사로 선종한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는?

4. 4대 박해 중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한 박해는?

5. 한불조약이 체결되면서 천주교 박해가 종식된 해는?

6. 1984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하여 시성한 성인은 몇 위인가?

7.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방한하여 시복한 복자는 몇 위인가?

 

 

답란


1. 성 정□□(□□로)

2. □□터

3. 최□□(□마□) 신부

4. □□박해

5. 18□□년

6. 1□□ 위

7. □□4 위

(정답은 ‘가이드 설명’에서 확인하십시오)

 

 

가이드 설명

 

1. 평신도 대표 성인

 

성 정하상(바오로)은 조선 교구 설정에 가장 공이 컸기에, 한국 성인 중에서 평신도들의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부친 정약종과 형 정철상은 신유박해(1801년) 때 일찍 순교하였고, 그는 기해박해(1839년) 때 모친 유소사와 누이 정정혜와 함께 순교하였지요. 이리하여 가족 모두가 성인과 복자의 영예를 얻은 대표 순교자 가정이 되었습니다. 정하상은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당시 박해의 주동자였던 우의정에게 상재상서(上宰上書)를 지어 교회를 옹호하고 박해의 비합리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지요.

 

2. 성 김대건 신부

 

모방 신부가 발탁하여 중국에 보낸 3명의 신학생 중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1845년 한국인 최초로 사제품을 받습니다. 그는 페레올 주교와 함께 조선에 몰래 입국하여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심한 고문을 받지요. 이로 인해 병오박해(1846년, 헌종 12년)가 일어나고, 김대건 신부와 현석문(가롤로) 등 9명이 순교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9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자른 목을 경고의 의미로 군문에 높이 매달아 놓음)을 받았습니다. 올해가 그의 탄생 200주년이기에, 한국 교회는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을 지내고 있습니다.

 

3.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

 

최양업(토마스) 신부는 1836년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849년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로 사제품을 받고 돌아왔습니다. 박해가 심하였기에 낮에는 숨어서 전국의 교우촌을 돌아다니고, 밤에 사목활동을 하다가, 1861년 과로로 길에서 선종하였지요. 김대건 신부는 수품 후 바로 순교한 데 반하여,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열심히 사목활동을 하다가 선종한 ‘땀의 순교자’입니다. 2016년 가경자로 선포되었고, 현재 시복 운동이 추진 중이지요.

 

4.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한 박해

 

대원군이 어린 고종을 섭정하면서 프랑스 선교사에 대한 탄압으로 병인박해(1866년, 고종 3년)가 시작되었습니다. 프랑스 성직자들이 순교하고 이들에 대한 학살을 문책하기 위하여 1866년 가을에 프랑스 함대의 침입(병인양요)이 있자, 박해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지요. 프랑스인 성직자들과 많은 교우가 새남터, 서소문 밖, 양화진(절두산), 갈매못 등지에서 순교하였습니다. 1874년 대원군이 하야할 때까지 8000여 명이 목숨을 잃게 되어 가장 많은 사람이 순교한 박해가 되었지요.

 

5. 한불 조약: 종교의 자유

 

조선 천주교회는 병인박해로 모든 성직자와 많은 신자를 잃음으로써 제2의 ‘목자 없는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러다가 1886년 조선과 프랑스의 한불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종식되고, 서양 성직자들의 종교 활동이 자유롭게 되면서 점차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지요.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대목구와 대구대목구로 분리되고 1942년에는 9개의 대목구가 설립됐습니다. 1962년에는 모든 대목구가 교구로 승격되어 자치 교계제도가 시작되었습니다.

 

6. 한국 성인 시성식

 

1984년에 한국 교회 창립 200주년을 맞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방한하여 103위 한국 순교자 시성식이 있었습니다. 이는 이례적으로 바티칸이 아닌 바깥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시성식이었죠. 103위를 박해 별로 분류하면, 기해 70위, 병오 9위, 병인 24위이고, 국적으로 분류하면, 한국인 93명(신부 1명, 평신도 92명),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인 10명(주교 3명, 신부 7명)이지요.

 

7. 한국 복자 시복식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아시아에서는 최초로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한국 순교자 124위 시복식을 주례하였습니다. 교황은 우리나라를 아시아 복음화의 횃불로 바라보면서, 한반도의 평화 통일과 화해를 기원하였지요. 124위를 박해별로 분류하면, 신유 前 14위, 신유 53위, 기해 37위, 병인 20위입니다. 지역별로 보면 한양(서울) 38위, 경상도 29위, 전라도 24위, 충청도 18위, 경기도 12위, 강원도 3위이고, 성별로 보면 남자가 100위, 여자가 24위이지요.

 

- 절두산 순교성지.

 

 

여행옵션 : 절두산 순교성지 (서울)

 

조선 시대 사신들을 접대하고 사대부와 문인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승지인 양화진 잠두봉이 지금의 절두산(切頭山)으로 명칭이 바뀐 것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부터이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략하고 물러난 후, 대원군이 전국의 천주교 신자들의 머리를 잘랐다 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이곳에서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신자 8000여 명이 순교하였는데, 잘린 목이 한강에 던져져서 머리가 산을 이루고 강물이 핏빛으로 변했다고 한다.

 

순교 100주년인 1966년 이곳에 순교자기념관(성당, 박물관, 경당)이 건립되었고, 27위 순교성인과 무명 순교자 1위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2020년 박물관 내부를 대대적으로 수리하여, 현재 절두산 순교성지 조성의 역사를 다룬 ‘땅의 영광: 성지가 된 치명터’ 전이 열리고 있다.

 

 

여행 기념품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3개월의 수감생활 동안 40여 차례의 문초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하여 함께 감옥에 갇혔던 사람들까지 천주교인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관장이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물었을 때, “그렇소. 나는 천주교인이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배교하지 않으면 곤장으로 때려죽이겠소” 하였을 때, “좋을 대로 하시오. 그러나 나는 결코 우리 하느님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이 천주교인이오?”라고 심문을 받는다면 어떤 대답을 하시겠습니까?

 

[가톨릭평화신문, 2021년 9월 19일, 마리 파울리타 수녀(노틀담 수녀회 교리교재 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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