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사도들의 표장은 무엇을 말하는가 중세기 그리스도인들의 사도상 식별법 중세기에 유럽의 대성당들에는 주요 출입로 양쪽이나 외벽에 사도들이 그리스도를 에워싸고 옹위하는 형태로 사도상(使徒像)들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1562년에 시작된 30년 종교 전쟁과 1793년에 발발한 프랑스 혁명으로 특히 프랑스에서 많은 대성당들이 파괴되었다. 그러다 보니 오늘날 사도상들이 온전하게 모셔져 있는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프랑스 파리에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 아미앵 대성당,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사도상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성인들에 앞서 사도들을 우선 공경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도들(왼쪽부터 성 바오로, 성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 성 토마스, 성 필립보, 성 타대오, 성 마태오). 그렇다면 중세기의 예술가들은 나중에 충원된 성 마티아 사도를 포함한 12사도들과 성 바오로 사도까지 모두 13분의 사도들을 어떻게 그림이나 조각상으로 표현했을가?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각각의 사도를 어떤 식으로 식별했을까?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신 뒤 저마다 다른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선포했고, 끝내는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가령, 성 베드로는 로마에서, 성 바오로는 소아시아와 터키와 그리스 일대에서, 성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는 스페인에서, 성 토마스는 인도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을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다른 사도들도 각자의 선교지에서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이렇듯 각지로 흩어져 가서 복음을 전하여 이룩한 성과들과 복음을 전하다가 끝내 순교로 삶을 마감한 이야기며 주변 일화들은 초기부터 교회 안에 전해졌고 오늘날까지도 전해 온다. 예술가들은 사도들을 작품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심했고, 마침내 사도들과 관련해서 교회에 전해 오는 일화들에 주목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화들과 일화들에서 각 사도들의 생애와 행적과 관련된 특징적인 면모들을 찾아내어 그림으로 또는 조각상으로 표현했다. 그렇게 해서 파리의 샤르트르 대성당에 사도상들이 모셔졌는데, 그 중에서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요한은 처음부터 외모상의 특징을 보고 알아볼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성 베드로는 짧은 곱슬머리와 정수리 부위를 삭발한 모습으로, 성 바오로는 머리가 벗어진 모습으로 구별되었다. 초대 교회 이래로 두 사도의 이 같은 특징은 바뀌지 않았다. 그리고 사도들 중에서 가장 젊은 막내였던 성 요한은 아주 고령에 이르렀을 때조차도 수염이 없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그러나 다른 사도들에 대해서는 이처럼 외모상의 특징으로 구별해서 표현하기가 모호하였기 때문에 각기 손에 고유한 상징물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상징물도 처음에는 단지 몇몇 사도에게만 해당하였고,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사도를 고유한 상징물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사도들을 나타내는 표상들 로마네스크 시대(대략 10~12세기)에 이미 성 베드로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죄를 맺고 푸는 권능을 받았음을 연상시키는 열쇠를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성 베드로를 제외한 다른 사도들은 대체로 책(성경)을 지닌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다가 13세기에 들어서 대성당 출입로의 양쪽에 사도들의 상(像)을 모시기 시작했는데, 이때부터 사도들은 각기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순교 도구를 손에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순교 도구로 사도의 신원을 식별하는 문제에 대한 합의는 먼저 성 바오로, 성 안드레아, 성 야고보(알패오의 아들), 성 바르톨로메오의 죽음과 관련해서 이루어졌다. 성 바오로는 목이 잘려서 순교했기 때문에 칼로 표상되었다. 성 안드레아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순교했기 때문에 십자가(X자형 십자가)로 표상되었다. 성 야고보(알패오의 아들)는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진 뒤 군중에게 곤봉과 몽둥이로 맞고 온몸에 톱질을 당해 순교했기 때문에 손에 곤봉(또는 톱)을 든 모습으로 표상되었다. 그리고 성 바르톨로메오는 산 채로 살가죽을 벗기우는 형벌로 순교했기 때문에 손에 칼이 들려 있는 모습으로 표상되었다. 그 뒤를 이어서 3명의 사도, 곧 성 요한, 성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 성 토마스가 고유한 표상으로 표현되었다. 아미앵 대성당의 서쪽 현관에는 독이 든 잔을 손에 든 모습으로 묘사된 성 요한의 상이 있다. 성 요한은 어느 마을의 촌장에게서 독이 든 잔을 받았다. 그 자리에는 사형수 두 명도 함께 있었는데, 그 두 사람은 그 독을 마신 후 이내 죽었다. 그러나 요한은 많은 사람이 지켜보는 앞에서 그 잔을 받아 들고는 십자 성호를 그어 축복한 다음 독을 마셨고,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다고 한다(또는 성인이 그 잔을 축복하자 그 독이 뱀으로 변했다고도 한다). 아무 일도 당하지 않고 살아남게 된 성 요한은 나중에 자신에게 독살하려 한 그 총독과 가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고 한다. 성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한 칼을 손에 든 모습으로 표상되기도 하고, 달리는 순례자의 용품인 지팡이와 물을 담는 호리병과 뜨거운 태양을 가려줄 모자 그리고 가리비조개 껍데기로 장식한 외투로도 표상된다. 가리비 껍데기가 성인을 표상하게 된 것은,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한 뒤 제자들이 성인의 시신을 빈 배에 태워서 바다에 띄워 보냈고, 그 배가 이베리아 반도의 어느 해안에 이르렀는데, 성인의 유해가 가리비 껍데기에 싸여서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는 전설과 관련된다. 성 토마스는 인도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이교도들에 의해 창에 찔려 순교했기 때문에 창으로 표상되었고, 한편으로 아미앵 대성당의 외벽에는 목수로도 활동하던 중에 인도 왕을 위한 궁전을 짓도록 위임받았다는 일화와 관련해서 그 사실을 상기시키는 목수용 직각자를 든 모습으로 표상되어 있다. 그렇지만 성 야고보(알패오의 아들)의 곤봉, 성 요한의 잔, 성 토마스의 직각자, 성 야고보(제베대오의 아들)의 지팡이 등이 각각의 사도를 나타내는 고정불변의 표상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실제로 중세기 내내 변함없이 인정되어 온 표상은 성 베드로, 성 바오로, 성 안드레아, 성 바르톨로메오의 표상뿐이었다. 그리고 성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과 같은 모양으로 십자가형을 당할 수는 없다며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리기를 자청했다는 일화와 관련해서 상하가 뒤바뀐 십자가로도 표현되었다. 나머지 다른 사도들, 곧 성 필립보, 성 마태오, 성 시몬, 성 타대오, 성 마티아의 표상들 또한 그 성인들의 생애에 대한 이야기와 얽힌 일화들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에서 고정되어 있지 않았다. 성 필립보와 성 타대오가 십자가로, 성 마태오가 도끼로, 성 시몬이 톱으로, 성 마티아가 미늘창으로 표상된 것은 15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나아가 사실성이나 역사성이 불분명하다고 여겨진 사도들에 대해서는 순교 도구가 아닌 다른 상징물로 표상하게 되었다. 곧, 세리였던 성 마태오는 돈주머니로, 항구 도시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한 성 타대오는 항해하는 배로, 뛰어난 ‘사람 낚는 어부’로 알려진 성 시몬은 물고기가 얹혀 있는 복음서로 표상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사도들의 표장 또는 문장은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형태를 이루게 되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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