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시노드 정신을 살아가는 교회 - 친교, 참여, 사명
시노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지난 호에서 시노드는 함께 사는 정신을 배우고 터득하는 기회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어온 여정에 관하여 성찰함으로써 교회의 다양한 지체들이 성령께서 이끌어주신 서로의 체험과 관점을 나누고 경청하는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야 할 쇄신의 길을 배우는 것이 시노드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노드에서 구체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달라지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입버릇처럼 ‘이 코로나 시국이 끝나면’ 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만 없어진다면 매사 다 좋아질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코로나 사태 이전의 세상이 꿈의 이상향은 아니었습니다. 이번 바이러스가 사라진다 해도 문제를 일으킨 원인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제2, 제3의 바이러스가 다시 일상을 어지럽힐 것입니다. 이번 사태 전에도 2003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이 사망률 9.6%를 기록하며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2015년에는 중동호흡기증후군(MERS)이 사망률 36%의 상처를 남겼습니다. 모두가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발생한 감염병인데, 이런 질병의 유행은 식생활의 육식화와 도시화, 신자유주의적 적시공급시스템, 전 지구적인 인구 이동, 원시적 생태계의 거주지 편입 같은 변화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생태계 균형을 깨뜨림으로써 벌어진 사태라는 것이지요. 창세기가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하느님 창조사업의 동반자로서 모든 피조물들을 ‘다스리는’ 권한(창세 1,26)을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생태계의 모든 것 위에 군림하라는 뜻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창세 1,28)고 말씀하신 창조의 본래 목적에 따라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관리할 책임을 받았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뭇 생명이 살아갈 터전을 파괴하면서 생태계의 균형을 깨뜨렸습니다. 이 때문에 벌어지는 지구 온난화나 이상 기후 문제는 감염병 유행과 더불어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생태 위기는 인간 사회의 불평등 문제와 연결됩니다. 우선 남아메리카와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가난한 국가에서는 부유한 나라에서 사용되는 자원들을 생산하기 위해서 생태계를 훼손하고, 상품을 생산, 유통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자원의 낭비가 일어납니다. 게다가 재앙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게 피해를 주지 않고 언제나 약한 이들을 더 괴롭히는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미세먼지와 이상 기후가 오더라도 누군가는 공기청정기와 공조시스템을 통해서 쾌적한 삶을 유지하는 반면, 가난한 이들은 속수무책인 것이 그 예입니다. 생태 위기와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비롯한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는 결코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이의 각성과 변화를 요구하는 위기 앞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성령의 도우심 안에서 해결의 지혜를 찾는 것이 이번 시노드의 주요 주제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피조물들이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더불어 사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조화로운 삶을 말하기에 앞서 우리 교회가 조화와 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교회를 이루는 우리부터 모범을 보이지 못한다면, 우리가 전하는 어떤 메시지도 힘을 잃겠지요.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의 현재 모습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어느 교우가 심각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막내아들의 성사 문제로 면담을 원했습니다. 아이는 안타깝게도 교리를 배우기는커녕 말을 배울 수 있을지조차 의문입니다. 유아세례는 받았지만, 견진과 영성체는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의학적 수단도 소용없는 상황에서 병자성사를 통해서 치유의 기적을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인지 물어봅니다. 이런 아이를 위해서 교회가 어떤 영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합니다. 온 가족이 성체를 영하는데, 혼자만 배제된 막내를 보면서 다른 가족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는지 생각해 봤느냐고 묻습니다. 또 다른 교우는 수년간의 고통스러운 결혼 생활을 접고 새출발하기로 했습니다. 함께 사는 일도, 헤어지는 일도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말 못 할 고민에 자존감마저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를 잡아준 것은 신앙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알리는 복음의 말씀들과 영성체로 얻은 힘이 버팀목이 되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뒷통수를 때리는 수군거림을 듣습니다. “아무개 씨, 조당 아닌가? 영성체해도 되나?” 성당에서만큼은 편견 없이 대해주길 바랐지만, 어느새 자신이 뒷담화의 소재가 되어버린 것을 발견했을 때, 교회 공동체는 너무도 낯설고 차가운 곳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개 형제는 긴 세월 동안 성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온 분입니다. 그러던 아무개 형제가 고민에 빠진 것은 공동체에서 봉사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서였습니다. 이만한 적임자가 없다고 봉사를 권유하는 분들이 있는 반면, 직책을 맡았으면 이러저러한 자리에서 지갑을 열고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느냐는 우려 섞인 충고도 만만치 않습니다. 차라리 공동체를 떠나서 혼자서만 조용히 미사에 다녀갈 수 있기를 바라는 아무개 형제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복음서는 예수님 주변에 참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고 증언합니다. 남들의 손가락질을 받거나 병 때문에 공동체에 어울리기 힘든 사람들, 가진 게 너무 많거나 너무 없어서 관계를 단절하고 살던 사람들이 예수님 덕분에 다른 이들과 어울려 살게 되었습니다. 키가 작아서 나무에 올라야만 예수님을 뵐 수 있었던 자캐오를 불러주시고(루가 19,1-7), 열 사람의 나병환자를 고쳐주면서 다시 사회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신 분도 예수님이셨습니다(루카 17,11-19). 서른여덟 해를 병마에 시달리면서도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는 벳자타 못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고 애원하는(요한 5,1-18) 안타까운 목소리를 오늘 우리 교회는 경청하고 있습니까? 내일이 달라지길 원한다면 오늘 준비를 시작해야 합니다. 비록 시노드가 모든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는 만병통치의 기회는 아닐지라도, 일단 대화와 경청을 통해 쇄신의 첫 발걸음을 디디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디딘 한 발은 내일의 더 큰 도약을 위한 디딤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2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