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160.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가톨릭 교회 교리서」 1699~1715항)
하느님 · 이웃과의 친교로 회복되는 인간 존엄성 인간은 존엄합니다. “하느님을 닮은 모습으로 창조”(1700)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존엄성은 정적인 존엄성이 아닙니다. 마치 과일을 담느냐, 보석을 담느냐에 따라 상자의 가치가 달라지듯 인간도 자신이 무엇과 친교 맺을 수 있느냐에 따라 존엄성이 완성되기도 하고 파괴되기도 합니다. tvN ‘꽃보다 누나’에서 암투병하던 김자옥씨가 자그레브 대성당을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한없이 눈물을 흘리던 장면이 기억납니다. 김자옥씨는 개신교 신자였습니다. 어쩌면 그녀에게 성당은 그저 돌과 유리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성당이 주는 위엄에 잠겨 잠시나마 힘든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대성당보다 더 완전한 성전입니다. 성전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능력이 있는 집입니다. 그래서 존엄합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하느님을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이 원죄로 인해 상처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보다 뱀을 선택하였고,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보다 돈을 선택하여 ‘기도하는 집’으로서의 존엄성을 잃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예언대로 2000년간 폐허로 남아 있습니다. 이 상처 입은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인간이 어떻게 다시 하느님 성전의 지위를 회복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 ‘사랑’을 받아들임을 통해서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를 통해서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하는 데에서 자기의 완성을”(1704) 이룹니다. 이에 우리도 그리스도를 닮아 하느님과 인간과의 “친교 안에서”(1702) 신적 존엄성을 회복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이시지만 인간이 하느님과 친교 맺을 수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옥사나 말라야’는 세 살 때 알코올 중독에 걸린 부모에게 방치되었습니다. 추운 어느 겨울에 버려진 그녀는 본능적으로 따뜻한 곳을 찾아 움직였습니다. 그녀가 찾아 들어간 곳은 커다란 개들의 집단 사육장이었습니다. 옥사나는 개들에게 공급되는 날고기와 사료를 먹으며 개들에 의해 키워졌습니다. 그렇게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우연히 옥사나가 발견됩니다. 그녀의 모습은 이미 사람인지 들개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20년 넘게 인간 사회에 적응하는 법을 가르쳤지만, 옥사나는 여전히 네 발로 걸으며 개처럼 짖었습니다. 어렸을 때 자신이 개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었기에 인간과 친교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입니다. 옥사나가 인간이 되려면 인간과 친교 맺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개로 살고 싶은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존엄성도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인간으로 가진 본성과 싸워야 합니다. 자신 안에서 “선과 악, 빛과 어둠의 극적인 투쟁”(1707)을 시작할 때 진정한 존엄성도 회복하기 시작합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하느님의 성전으로 하느님까지 사실 수 있는 집이라는 믿음을 간직하고 하느님과도 친교 맺을 수 있는 존재임을 믿을 때 완성됩니다. 단순한 인간이 아닌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으로 하느님을 잉태하여 “성령 안에서 사는 새 생명”(1708)을 누릴 존재임을 믿어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까지 친교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믿음만큼 자기 존엄성을 완성합니다. [가톨릭신문, 2022년 3월 20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죽산성지 전담 겸 영성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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