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시노드 정신 살아가는 교회 - 친교, 참여, 사명
무슨 이야기를 할까요? 1. 안 해도 될 이야기, 꼭 해야 할 대화 함께 소임 하는 동료이자 후배 신부님의 푸념을 들었습니다. “형님, 신부님들이랑 교우들이 사석에서 이야기하시는 모습을 관찰해 보니까, 맛집이 어디 있다, 어디 여행 가면 좋다, 그런 건 열심히 알려주면서 정작 기도를 어떻게 할까, 신앙이나 윤리에 관한 궁금증은 어떻게 해결할까 같은 문제는 다들 입 다물고 계시더라고요.” 듣고 보니 제 경험도 별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성당 모임인데, 오가는 이야기들은 정치나 연예계 루머들, 소비하고 노는 이야기들, 자녀의 성공담이나 과거 무용담 같은 과시성 주제들이었습니다. 여행이나 취미 정보 따위도 자주 거론되고요. 처음 신앙생활에 입문하는 이들이 기도를 어떻게 하는지, 신앙 체험은 어떠한지를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눈치껏 따라 해라”로 끝나기 십상입니다. 성경을 읽다가 생기는 의문이나 알아듣기 어려운 교리와 교회 관습에 대해서는 말을 꺼내기조차 힘듭니다. 한담은 한담대로 친목에 도움이 되겠지만, 정작 대화를 해야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말을 너무 아끼지 않나 싶습니다. 그래서 시노드 사무국은 우리가 모여서 나눌 이야기들을 아홉 가지로 추려서 권합니다. 주제들을 한 번 훑어볼까요? 2. 시노드에서 할 이야기들 : 아홉 가지 주제 첫째 주제는 ‘여정의 동반자’ 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 불린 신앙인들은 다양한 사람들이 일치를 이루는 과정을 통해서 친교가 무엇인지 터득하게 되지요. 그런데 그 여정에서 시나브로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은 실패와 좌절을 겪을 때 위로하고 격려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만, 힘들 때 오히려 교회에 나오지 못하고 움츠려 들어서 외롭게 지내는 분들을 봅니다. 입시나 사업에 실패해서, 이혼해서, 실직해서…. 냉담의 이유도 다양합니다. 힘들수록 더 큰 위로가 되어주는, 어머니 품 같은 교회는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요? 둘째와 셋째 주제는 ‘경청’과 ‘말하기’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평소 다른 이들과 말 붙이기 힘들었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유다인 남성과 일반적으로 말을 섞지 않았던 사마리아 여인(요한 4,14~26), 경건한 이들은 상대해주지 않던 세리 자캐오(루가 19,1~4) 같은 사람도 예수님과는 쉽게 대화의 물꼬를 틀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작 오셨다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마르타의 원망(요한 11, 21)이나,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모습을 뵙고 감격한 나머지 초막 셋을 지어 산 위에 눌러 앉자는 베드로의 뜬금없는 건의도 들으시는 것을 보면, 특별히 대화 주제를 가리지도 않으셨던 것 같습니다. 설사 말실수가 있다 하더라도, 재미있거나 도움이 될 말이 아니더라도,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언로를 막지 않으면 거기에는 대화가 있고 일치가 일어납니다. 경청하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경우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는 몇몇만 말을 하고 나머지는 듣기만 하는 곳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천국의 성직자 방에는 입만 가득하고, 수도자 방에는 귀만 가득하며, 평신도 방에는 발만 가득하더라는 우스개가 있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신앙공동체가 어떻게 하면 누구나 편히 말할 수 있고 누구의 말이든 경청하는 대화의 공동체가 될 지 의견을 나눠 봅시다. 넷째 주제 ‘말씀의 경청과 전례 거행’은 신앙공동체가 힘을 얻는 원천이자 모임의 중심인 전례를 어떻게 거행하고 있으며, 전례를 통해 배우고 기도한 것을 일상 속에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지 돌아보자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일차적으로 예배하는 공동체, 기도하는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전례를 통해서 함께 기도하면서 우리 자신을 변화시킵니다. 마법의 주문(呪文)이 신(神)을 조종해서 내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나를 바꾸는 것이라고 하지요. 진정 나를 바꾸는 전례, 하느님 안에서 공동의 꿈과 공동의 사명에 마음을 모으는 전례가 되고 있는지 돌아볼 일입니다. 다섯째 주제, ‘사명 안에서의 공동 책임’은 신앙인들이 각자의 방법으로 제자된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성찰하게 합니다. 성직자들이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교회에 봉사하고, 수도자들이 공동체를 통해서 친교의 모범이 된다면, 평신도들은 세상 속에서 사제직과 봉사직과 예언직을 수행합니다. 성직자건 평신도건 세례 받은 신앙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도리가 있지요. 우리가 그 책임을 서로 존중하며 나누고 있는지 대화해 봅시다. 여섯째 주제 ‘교회와 사회 안에서의 대화’는 우리 공동체가 사회 속에서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는 것입니다. 일찍이 성공회의 윌리엄 템플 대주교는 교회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존재하는 유일한 공동체”라고 정의한 바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는 친목단체도, 이익집단도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과 세상에 봉사하는 공동체입니다. 일곱째와 여덟째 주제는 ‘권위와 참여’, 그리고 ‘식별과 결정’입니다. 입 다물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강요와 명령은 교회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성령이신 하느님께서는 세례 받은 모든 이에게, 모든 이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신앙인은 어디 가는지도 모르고 노만 젓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배가 어디로, 왜, 어떻게 갈 것인지 알아보고 결정하는 것은 모두의 책임입니다. 달랑 선장님 나침반 하나에 의지하는 배와, 각종 레이더며 나침판, 망원경과 해도 같은 것들을 두루 확인하며 나아가는 배는 뭐가 달라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아홉째 주제, ‘시노달리타스를 통한 양성’은 이번 시노드가 한 번 하고 마는 행사가 아니라 교회가 살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습니다. 시노드를 계기로 공동체가 ‘다양성 안의 일치’를 실현하고 모범을 보일 수 있도록 앞으로 어떻게 모이고 대화할지 의견을 나눕시다. 3. 더불어 사는 내일로 우리는 뭇 생명과 더불어 사는 삶을 망각한 나머지 코로나 사태를 맞고 말았습니다. 소를 잃었을 때 외양간을 고치면 희망이 있겠지만,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살아서는 내일의 변화가 있을 수 없겠지요. 이번 시노드가 오늘을 성찰하며 내일의 꿈을 꾸는 자리가 되길 바랍니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5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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