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꿀벌, 교회와 그리스도인 삶의 상징 - 성 베드로대성당 중앙제단의 기둥들. 꿀벌은 풀과 나무에서 새잎들이 나오고 꽃들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면 나비와 더불어 지천으로 볼 수 있는 곤충이다. 그리고 서양의 오래되고 큰 성당들에 가면 더러는 감실이며 제대 위의 촛대들에서, 나아가 건축물의 기둥들에서도 예술적으로 또는 정교하게 꿀벌들이 묘사된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령,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중앙 제단은 거대한 기둥 4개가 떠받치는 발다키노(천장 덮개)로 덮여 있는데, 베르니니(Bernini)가 제작에 관여한 이 기둥들에는 나뭇잎들과 꽃들이며 그 사이사이에 꿀벌들이 새겨져 있다. 신성한 공간인 성당에, 그리고 미사 성제에 쓰이는 거룩한 기물들에 한낱 작은 곤충인 꿀벌이 묘사되어 있는 까닭과 그 상징성은 무엇일까. 그 이유인즉, 꿀벌은 교회가 어떠한 존재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며 또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나타내주는 상징이기 때문이다. 이타적인 꿀벌의 생태, 그리고 교회의 삶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349~407년)는 일찍이 꿀벌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꿀벌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칭송을 받는데, 그 까닭은 벌이 그저 (열심히)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남(이웃)을 위해 일을 하기 때문이다.”(설교집 12) 실제로 꿀벌은 벌집이라는 하나하나의 개별 공동체를 이루어 살면서 그 공동체 안에서 공동의 선익을 위해 쉼 없이 일한다. 중세기 그리스도인들은 꿀벌의 이러한 생태를 보면서 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수도자들 또한 꿀벌과 마찬가지로 교회 공동체와 수도 공동체 공동의 선익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읽어냈다. 그리고 꿀벌들이 여왕벌을 중심으로 모여서 그에게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교회의 구성원들 또한 그 장상을 중심으로 그에게 순명하며 살아가는 면모를 알아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꿀벌의 생태는 그리스도인들의 어머니인 교회가 영적인 결실을 맺는 방식을 상징하기도 한다. 꿀벌은 대부분 암컷이지만 여왕벌을 제외한 나머지 벌들은 번식을 위한 수정 활동을 하지 않는다. 꿀벌들은, 교회가 거룩한 성사들을 통해 은총을 전달하는 것처럼, 순결한(성적인 접촉이 없는) 육체를 움직여서 생산해낸 꿀과 밀랍을 사람이나 동물 등 수혜자들에게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순결한 벌들의 노동으로 일구어낸 결실 중 하나인 밀랍은 미사 성제를 봉헌할 때 제단을 밝혀 주는 초를 만드는 데 최상의 재료라고 여겨져 왔다. - 야생의 벌집. 그리고 꿀벌은 수없이 많은 꽃들을 찾아다니며 조금씩 채취한 꿀의 원료들을 모아서 마침내는 영양이 풍부하며 맛까지도 달콤한 꿀을 만들어낸다. 그런 점에서 복음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 또한 꿀벌이 온갖 꽃을 찾아다니며 꿀을 채취하듯 그리스도인도 자기가 살아가면서 취할 수 있는 좋은 모든 것을 취해야 하고, 취한 것들을 자신과 이웃에게 쓸모 있는 요긴한 요소로 변형시켜 나가야 한다고 본 것이다. 나아가, 꿀벌은 식물을 도와 인류와 세상에 좋은 것을 제공 한다. 식물은 태초부터 세상의 생명체들이 생존하는 데 꼭 필요한 식품과 맑은 공기, 거기에다 아름다운 풍경까지 제공해 왔다. 그리고 꿀벌은 이 식물들의 수정 활동을 도와 식물들이 번성하게 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이웃을 위한 좋은 일을 식물들과 함께해 온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들 또한 꿀벌처럼 끊임없이 자신과 이웃의 선익을 생각하고 이웃에게 자선을 베풀며 살아가야 하는바, 꿀벌은 그러한 그리스도인 삶의 좋은 본보기라고 여겨졌다. 꿀벌의 교회와 관련한 상징성은 계속 이어졌다. 꿀벌은 쉬지 않고 일할 뿐 아니라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선익을 위해서 필요하면 망설이지 않고 목숨까지도 바친다. 가령, 꿀벌은 자기 공동체의 기반인 벌집이 혹시라도 적대적인 존재에게 침입을 받으면 즉각 단호하게 맞선다. 그렇게 해서 벌집뿐 아니라 그 안에 저장하는, 생존이 걸려 있는 꿀까지도 끝까지 지켜낸다. 그런가 하면 더위가 심해지거나 습도가 높아지면, 꿀벌은 벌집의 열기를 식히고, 꿀이 녹아내리지 않도록 벌집 외부에 달라붙어서 필사적으로 날개를 움직여 부채질을 한다. 이는 많은 꿀벌이 죽어 나갈 정도로 가혹한 과정이지만, 꿀벌은 자신과 공동체의 존립을 위하는 일을 기피하지 않는다. 이 점 또한 가톨릭교회의 놀랍고도 독특한 한 가지 현상과 연결된다. 이를테면 가톨릭교회에는 자신이 몸담은 공동체를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구성원들, 호교론자들, 순교자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교회의 선익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쳤고, 그렇게 흘린 피는 교회의 역사에서 여러 차례 증언된 바와 같이 활기찬 성장의 밑거름이 되었다.
꿀벌과 흡사한 교회 삶의 면모 이렇듯 꿀벌은 여러 면에서 교회와 그리스도인 삶의 모범적이고 이상적인 본보기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러한 꿀벌의 생존은 궁극적으로 일벌들이 여왕벌을 정점이자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며 보여주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충성과 복종에 달려 있다. 이러한 관계는 가톨릭 신자의 삶에서도 흡사하게 나타난다.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영원한 구원을 위해, 그리고 세상과 욕망과 악마로부터 보호받기 위해 하늘의 여왕이신 성모 마리아님께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존하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꿀벌은 이러한 관계 안에서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권위 있는 존재인 여왕벌이 그들에 앞장서서 무리를 이끌고 다른 영역으로 이동해 가지 않는 한 감히 둥지를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병정벌들은 이 둥지와 여왕벌을 경비하고 수호하는 일을 본능적으로 목숨을 바쳐가며 수행한다. 가톨릭 신자가 끝까지 교회 안에 머물러야 하고 교회와 교회의 모후이신 성모 마리아님을 수호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 성 암브로시오의 문장. 한편, 꿀벌이 생산하는 꿀은 사람의 미각에 썩 잘 부합하는 단맛을 지녔기에 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달콤함을 전달하는 글을 잘 쓰는 문장가나 말을 잘하는 달변가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달콤한 꿀을 저장하는 벌집이 두 분의 교회학자, 곧 성 암브로시오와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를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이 두 성인은 ‘꿀처럼 달콤한’ 말솜씨와 글솜씨로 일찍부터 교회에서 ‘꿀 같이 달디단 사람’(mellifluus) 그리고 ‘꿀처럼 달달하게 만드는 사람’(mellificuus)이라고 일컬어진 분들이다. 끝으로, 교회의 오래된 감실들을 보면 전통적으로 야생의 벌집과 비슷한 모양으로 생겼다. 이 점 또한 꿀벌의 상징성과 관련해서 눈여겨볼 만하다. 지난겨울 이래로 우리 주변에서 엄청나게 많은 꿀벌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꿀벌의 상징성을 살펴보는 것이 자연의 생태계뿐만 아니라 신앙의 생태계에서도 그 존재의 소중함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5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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