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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노드 정신을 실제로 이루기
작성자주호식 쪽지 캡슐 작성일2022-06-12 조회수1,015 추천수0

[알아볼까요] 시노드 정신을 실제로 이루기

 

 

1. 그러다 말겠지?

 

어느새 본당 차원의 시노드 모임 결과를 정리해서 한국 교회의 목소리로 종합해야 할 시점이 되었습니다. 모임에 참여했던 교우들의 후일담이 조금씩 들려오는데, “뭘 해야 하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시작했지만, 모여서 대화를 나누고 경청하는 그 자체가 좋았다”는 말씀을 종종 듣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간관계가 단절되고 대화가 실종되는 가운데, 교우들끼리라도 서로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기쁨을 누릴 수 있었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할까요, 시노드에 대해서 우려와 냉소 섞인 시선도 함께 느낍니다. “그러다 말겠지” 식의 차가운 시선 말씀입니다. 이런 시선을 마냥 기우라거나 ‘어딜 가나 불평하는 사람은 있다’며 눙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겪고 느낀 바가 있어서 하시는 말씀들이니 흘려버릴 말씀도 아닙니다.

 

사실 시노드가 목표로 삼은 ‘함께 가는 길’은 교회 안에서 처음 나온 말이 아니었습니다. 교회가 지나치게 성직자 중심으로 운영되어서 상호 소통이 잘 안 된다는 지적, 한국 교회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을 대변하는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개혁과 쇄신을 뜻하는 이탈리아어)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비판은 어제 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지요.

 

이런 지적과 비판 앞에서, 한국 교회 차원에서든 교구 차원에서든 뭔가 바꿔보려는 움직임이 늘 있었습니다. 교구 시노드를 연다든가, 교구 내 기구들을 새로 만든다든가 하는 시도를 했지요. 그런데 모여서 토론하고 바꾼 결과가 모두에게 피부에 와 닿게 경험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치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 듯 착시현상을 일으킵니다. 그런 까닭에 이번 시노드에서도 ‘그러다 말 것’이라는 부정적인 경험칙이 생길 법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시노드가 ‘그러다 말’ 행사로 전락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2. 시노드가 빠질 수 있는 위험

 

때마침 지난달(2022년 3월19일)에 교황청 시노드 사무국과 성직자성 공동 명의로 전 세계 사제들에게 보낸 서한을 받았습니다. 사제들이 시노드에 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내용인데, 그중에서 함께 나눌 내용들이 있어서 소개합니다.

 

먼저 서한은 시노드 여정에서 만날 수 있는 위험을 짚습니다. 시노드를 하나의 공허한 슬로건으로 축소시키는 형식주의, 시노드를 문제들에 대한 이론적인 숙고의 노력 정도로 만들어 버리는 지성주의, 아무것도 변화하지 않게 우리가 그동안 행해오던 것이 보장하는 안전함에 우리를 고정시키는 복지부동의 자세가 그와 같은 위험들입니다. 아마 시노드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신 분들이 염려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3. 세 가지 당부

 

그래서 서한은 세 가지 당부를 통해서 위험을 극복하자고 권합니다.

 

첫째는 시노드의 여정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생활하는 것에 뿌리를 두는 것입니다. “성경에 열중하도록 합시다. ‘말씀’이 우리 깊은 내면까지 파고 들어오시게 합시다. 그 말씀은 하느님의 새로움을 드러내주고, 지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게 해줍니다(프란치스코 교황, ‘하느님 말씀 주일’ 강론 중).” 이어서 서한은 말합니다. “말씀에 뿌리내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둠 속을 걷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고, 우리의 성찰은 한낱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씀을 실행에 옮기면, 우리는 반석 위에 집을 짓게 될 것이고(마태 7,24~27 참조)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부활하신 분의 빛과 그분의 놀라운 인도하심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시노드뿐만 아니라 신앙인들의 삶 전체가 말씀에 뿌리를 두어야 합니다. 간혹 자기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끌어 쓰는’ 경우들을 봅니다. 하느님 말씀에 뿌리를 두고 말씀에 견주어 자기를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은 절대 바꾸지 않으면서 남에게 자기 생각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하느님 말씀을 이용하는 것이지요. 시노드의 여정은 교회 안에서 성경을 학문적으로 배운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또 학식이 높거나 그렇지 않거나를 가리지 않습니다. 성령께 마음을 열고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데 예외가 있을 수 없고, 그렇게 얻은 생각은 모두 귀한 것입니다.

 

둘째로 서한은 서로에 대한 경청과 수용이 시노드 여정의 고유한 특색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자고 권합니다. 깊은 대화와 진정한 만남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입니다. 여행을 다니다보면 어디를 가느냐 보다 누구랑 가느냐가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지요. 업무 때문에 가는 출장이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 좋은 사람과 함께 다니는 것 자체로 즐겁고 기쁩니다. 우리가 함께 걷는 시노드 여정이 반드시 성과를 내고 업적을 만들어야 하는 출장길은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새 계명을 실천하는 여정이 되어야지요.

 

셋째, 서한은 시노드의 여정이 단순히 자기 내면을 되돌아보는 것으로만 이끄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와 만남을 추진하는 것이 되도록 하자고 권합니다. ‘복음의 기쁨’ 회칙에서 밝히신 것처럼, “인류가 가진 상처들로 인하여 자기 손이 더러워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교회, 가난하고 변방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섬기며 여정의 길을 걷는 교회”는 교황님의 꿈입니다. 우리는 이 꿈을 함께 꾸고 실천하자고 초대받았습니다.

 

우리 사회는 여러 가지 형태의 분열과 갈등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 동네를 이루고 뭐라도 주고받으며 살던 모습은 과거의 기억으로만 남습니다. 부유한 아파트 단지로 갈수록 도어 록과 CCTV로 사람을 가르고 담장을 높이는 모습을 봅니다. 세대 간의 갈등, 성별 간의 갈등이 깊어지고 수도권과 지방, 도시와 농어촌의 연대는 약해집니다. 이권을 노리며 ‘결사반대’를 함께 외치는 이익집단은 생겨나지만, 손해를 좀 보더라도 더불어 살자는 마음은 옅어져 갑니다. 교황님께서 ‘모든 형제들’ 회칙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침묵과 주의 깊은 경청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조급하고 빠른 문자 메시지 소리로 바뀌면서 사려 깊은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구조가 위험에 놓이는”(모든 형제들, 49항)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우리가 함께 하고 있는 시노드 여정은, 교회의 참된 얼굴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 걷고 서로 경청하며 서로의 생각과 계획을 나누는 것입니다. 모쪼록 우리가 함께 걷는 여정이 ‘그러다 말’ 일이 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기도하고 노력해 봅시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2년 6월호, 박용욱 미카엘 신부(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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