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 상징 읽기] 자연 속 모든 것이 하느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말한다 이 글의 제목에서 표현되는 원칙은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신앙의 눈길로 볼 때 우리가 속해 있는 자연, 그리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각종 구성원들은 저마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우리에게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의 계명에 대한 가르침과 교훈을 전달한다. 중세 이래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생각해 왔다. 많은 이들이 하느님의 피조물들에서 교훈적인 상징성을 읽어냈다. 이를테면 하느님의 자녀인 인간은 살아가면서 악과 마주쳤을 때 그 악에 저항하고 맞서 싸워야 하는데, 이 숭고하고 준엄한 의무인 영적 싸움을 위해서 필요한 여러 자질과 미덕을 자연계와 그 안의 피조물 구성원들에게서 보고 배울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니까 동물의 세계는 그 나름으로 선과 악의 각기 다른 측면들에 대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개개의 동물들이 나름의 악덕이나 미덕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동물들이 특유의 단순한 동물적 본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좋은 원칙이나 또는 나쁜 원칙에 따라 행동할 수 있다는 것도 아니다. 뱀과 어린 양 가령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로 뱀이 있고 또 어린 양이 있다. 뱀도, 어린 양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그런데 뱀은 많은 비유 이야기들에서 보듯이 특유의 교활함, 인간에게 끼치는 유해성, 미끄러지듯 기어 다니는 특성, 상대방을 호릴 줄 아는 능력을 지녔다고 여겨져서 부정한 행위와 악을 가리키는 데 걸맞은 상징이 되었다. 마침내는 악마가 하와를 유혹하고자 말을 건네는 수단으로 이용되기에 이르렀다. 그런가 하면 다른 비유 이야기들에서는 어린 양이 순수함, 온유함, 무구함을 가리키는 상징성이 넘친다고 여겨져서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를 가리키기에 알맞은 상징이 되었다. 사실, 뱀이나 양 모두 똑같이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다음 보시고 흡족해하신 좋은 피조물들이다. 그런데 저마다 우리에게 선을 상징하거나 또는 악을 상징하게 됨으로써, 우리가 하나는 사랑할 수 있게 되었고 다른 하나는 미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동물들은 그저 동물들일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쩌면 진부한 표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해봄 직한 면 또한 있지 않을까. 오늘과 같이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은 이 세상을 닮아서 역시 복잡해지고 혼란스러워져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떤 사람이 물 한 잔을 마시려고 한다면, 그 사람 앞에서는 물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것이 아니라 물은 그저 물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이 언제든 훨씬 좋을 것이다. 토끼를 먹이로 잡는 매 그런가 하면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 중에 매가 토끼를 쫓아가 덮치는 모습이 있다. 토끼는 겁에 질려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세상에서 가장 빠르게 나는 조류라는 매는 그 토끼를 쫓아가서 붙잡아 먹이로 삼는다. 이 매를 보며 우리는 강력하고 멋진 비행의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래서 매는 전사(戰士)의 미덕인 냉정함, 힘, 민첩성, 정확성을 가리키는 멋진 상징이 되었다. 매는 자신이 중력의 법칙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자랑이라도 하는 듯이 공중에서 임의롭게 균형을 유지하며 쉽게 움직인다. 토끼의 움직임에 맞춰 속도를 조절하며 그 뒤를 쫓는다. 강력한 발톱과 부리는 어느새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벌어져 있다. 그러고는 공격의 정점에서 그 자체로 감탄스러운 날개를 펼쳐서 멋진 비행을 한다. 물론 이 장면을 보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만 저 불쌍한 작은 토끼는 어찌하나요? 매가 토끼를 공격하는 것이 옳고 정당한 일인가요?”라고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듯 매의 공격에 민감해지는 사람은 이런 대답, 곧 동물들이 서로 잡아먹는 것은 안배하시는 하느님의 뜻에 따른 섭리라는 대답에도 또한 화를 낼 것이다. 그런데 매가 토끼를 잡아먹는, 그러니까 이 동물이 저 동물을 잡아먹는 동물의 세계는 인간이 인간을 함부로 죽이거나 해코지를 해서는 안 되는 인간의 세계와는 다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화목하며 평화롭게 살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험난하고 치열한 이 눈물의 골짜기에서 사는 동물들에게는 서로 잡아먹으며 살도록 안배하셨다. 나아가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동물을 먹는 것도 허용하셨다. 이로써 하느님은 인간이 단순한 동물보다는 훨씬 뛰어난 존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이다. 어느 면에서 하느님은 평등주의자가 아니시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또 하나의 아주 크고 중요한 가르침이다. 독수리 그리고 우리는 독수리가 조류 중에서도 사납고 무서운 새라는 것을 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탐욕과 교만과 교활함만큼 두려워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우리가 영적으로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한다는 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것으로 생김새마저 무시무시한 독수리만 한 것이 또 있을까? 독수리의 낮은 이마는 더할 나위 없이 음흉하고 교활해 보이며, 곧추세운 머리는 오만하기 이를 데 없이 보인다. 냉혹해 보이는 시선과 비웃고 조롱하는 듯한 입매, 사뭇 호전적으로 휘어 있는 부리와 공격하는 데 알맞도록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는 끔찍한 기동력에 이르기까지 호감이 갈 만한 구석이라곤 없어 보인다. 말하자면 독수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같다. 그런데 이는 무엇에 대한 두려움인가? 그것은 도덕적인 악에 대한, 우리를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떨어져 나가게 하는 악에 대한 두려움이다. 그러니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경계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악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또한 사람들은 악에 대해, 악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느님께서는 독수리와 같은 상징을 통해서라도 그러한 악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하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자연계를 들여다보고 살펴보는 가운데 지나치게 감상적이어서도 안 되고 또는 필요 이상으로 자유주의적이어서도 안 된다는 교훈을 깨우칠 수 있을 것이다.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23년 1월호, 이석규 베드로(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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