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14]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신” 1 :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3-5) 신앙고백의 핵심인 이 케리그마는, 코린토 1서가 쓰여진 54-55년경 훨씬 이전부터 이미 교회 안에서 사용되던 고백이라고 봅니다.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셨다는 고백은 성경 곳곳에 나타납니다.(로마 5,8; 갈라 3,13; 에페 5,2; 1요한 3,16) 그리고 갈라티아서에는 이보다 더 강한 “나를 위하여”(2,20)라는 표현도 보입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사건에 직접적으로 개입되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걸까요? 우선은 정말 예수님이 돌아가시는 것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지 예수님 자신에게 여쭤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너무 따지는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만약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신 적이 없다면, 서간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고백은 그 신빙성이 좀 떨어질 수도 있을 테니까요. 다행히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미리 아셨고 그 의미에 관한 설명도 하고 계심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직접적으로는 세 번의 수난 예고(마르 8,31-33; 9,31; 10,33-34), 그리고 간접적으로는 살해된 목자와 흩어진 양떼 비유(마태 26,31), 당신이 마실 잔과 받을 세례(마태 10,38) 등등에서 당신이 폭력적 죽음을 당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셨습니다. 당신 죽음을 미리 아셨다면, 그런 죽음의 의미도 생각하셨겠지요? 성경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을 몇 군데서 볼 수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최후의 만찬입니다.(마태 26,26-29; 마르 14,22-25; 루카22,15-20; 1코린 11,23-25) 약간의 표현상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죽음을 ‘많은 사람을 위한’, ‘너희를 위한’ 죽음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공통적입니다. 이것은 특히 마르 10,45에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여기에서 “몸값”은 희랍어로는 ‘뤼트론(λυτρον)’인데, 이는 노예 해방을 위한 몸값, 사형수의 목숨값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님 자신이 당신의 죽음을 ‘많은 이들을 위한, 많은 이들의 구원을 위한 속죄’로 이해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대속’이라고 표현합니다. 한편 핀트가 약간 벗어나긴 하지만, 마르 10,45의 말씀의 맥락은 이 말씀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이 영광 받으실 때 각기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당신이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는지 물으시고, 그들이 그렇다고 하자, 왼편이든 오른편이든 그 자리에 앉는 일은 당신이 허락할 일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이 이 두 사도를 매우 불쾌하게 여깁니다. 한 마디로 제자들은 권력을 누가 더 가질 것인지에 관심이 있지요. 속전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제자들을 향한 답입니다. [2023년 5월 21일(가해)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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