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25. 구약성경에 나타난 기도 ④ (「가톨릭교회 교리서」 2581~2597항)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기도의 열매를 맺는다 - 프라 안젤리코 ‘수태고지’.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시고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은 성모 마리아의 믿음이 기도의 방향이다. ‘솔로이스트’(2009)는 실화 기반의 영화입니다. ‘솔로이스트’는 음악 분야에서 솔로 공연을 할 줄 아는 능력의 가수나 연주자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도움을 거부하고 혼자 힘만으로 살려는 노숙자 나타니엘을 상징적으로 비유합니다. 스티브 로페즈는 길거리에서 우연히 노숙자 나타니엘 에이어스의 2현 바이올린 연주를 듣습니다. 사실 나타니엘은 뉴욕 줄리어드 음대의 전도유망한 학생이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연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환청을 듣게 되고 결국 두려움을 피하려고 노숙자가 되었습니다. 로페즈는 나타니엘을 돕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거처를 내어줍니다. 그에게 용기를 주어 작은 독주회도 열어줍니다. 하지만 여전히 내면의 목소리에 휘둘린 그는 어렸을 때처럼 청중 앞에서 도망을 칩니다. 로페즈는 정신 치료를 먼저 받게 하지 않으면 그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정신과 치료를 제안합니다. 그러자 나타니엘은 자기를 미친 사람 취급한다며 로페즈를 공격합니다. 나타니엘은 다시 노숙자가 되어 악기를 주워 홀로 연주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라고 하십니다. 도움도, 은총도, 성령도 아무에게나 주어지면 안 됩니다. 그러한 은총을 통해 자기의 수준을 깨닫고 더 높은 본성으로 나아가려는 이들에게만 주어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전의 자기 처지를 여전히 긍정하고 포기하지 않으려 하면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는 꼴이 됩니다. 기도는 성령을 받고 은총을 받는 시간입니다. 교리서는 “하느님의 일을 추진하시는 분도, 인간의 응답을 불러일으키시는 분도 같은 성령”(2587)이라고 말합니다. 선물을 받으려면 선물을 주는 이와 머물러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도움을 받으면 그 도움을 받는 사람과 함께 해야 하며 그의 뜻을 따라주어야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기도로 “하느님과 단둘이 있음으로써” 성령을 받아 그들의 사명을 위한 빛과 힘을 얻었습니다.(2584 참조)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여라”(마르 14,38) 하고 이르십니다. 깨어있음은 마치 멀리 떠나있는 주인이 이미 돌아와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삶을 의미합니다.(마태 24,42 참조) 기도하면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주님께서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믿어집니다. 혼자 있으면 내면의 목소리에 잠식당해 죄에 떨어집니다. 반면 기도로 받는 성령께서는 주님의 ‘현존’(現存)을 믿게 하심으로써 내 뜻이 아니라 주님 뜻이 실천되게 하십니다. 따라서 오직 자기를 부정할 줄 아는 사람만 기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모든 죄는 자기를 긍정하여 하느님의 현존을 잊음으로써 시작됩니다. 하와는 뱀과 머묾을 선택하고 하느님을 잊었습니다. 그러다 받은 선물까지 잃었습니다.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것보다 주님과 동행함이 더 큰 행복임을 아는 것이 ‘회개’입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마음의 회개를 호소합니다. 그들은 엘리야처럼 하느님의 얼굴을 열렬히 찾으며 백성을 위하여 간구합니다.”(2595) 성모 마리아를 닮읍시다. 성모 마리아는 아드님을 잉태하시고는 절대 그분의 현존을 잊으실 수 없으셨습니다. 어머니는 태중의 아기를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안에도 성체로 그리스도께서 계십니다. 그 그리스도의 현존을 믿음이 기도의 방향입니다. 기도로 선물을 받음과 그 선물을 주시는 분과의 만남은 결국 하나입니다. [가톨릭신문, 2023년 7월 9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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