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21] 그리로부터 오시리라 믿나이다 : 파루시아 (1) “갈릴래아 사람들아, 왜 하늘을 쳐다보며 서 있느냐? 너희를 떠나 승천하신 저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것이다.”(사도 1,11)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오신다’는 이 희망은 부활 신앙과 함께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이룹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이 ‘머지않아 곧’ 오실 것이라 믿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 달리 그 ‘시간’은 지체되었고, 예수님의 이 ‘오심’이 어떤 것인지, 그리고 자신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말로 ‘다시 오심’, ‘재림’이라고 표현하는 이 ‘사건’은 종말, 그리고 심판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킵니다. 신경에서도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하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오실 그리스도를 마주할 생각에 설레고 기뻐하기보다는 두렵고 무서운 마음이 더 크게 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재림에 대해 좀 더 이해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왜냐 하면 재림은 일차적으로 우리가 믿고 사랑하는 예수님이 오시는 설레는 사건일 테니까요. ‘재림’이라고 번역된 그리스어는 파루시아(παρουσƟα)입니다. 그리고 앞서 인용한 사도 1,11에서 사용한 단어 ‘에르코마이(ερχομαι)’는 ‘다시’라는 수식어 없이 단순하게 ‘온다’를 의미합니다. 파루시아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24회 등장하는데 대부분 서간문에서 사용됩니다. ‘여기 있다’, ‘현존하다’, ‘오다’라는 뜻의 동사 ‘파레이미(πƜρειμι)’에서 유래한 이 단어는 어떤 사람의 현존, 지금 여기에 있음, 혹은 ‘머물기 위해 옴’을 의미합니다. 파루시아는 ‘귀환’, ‘다시 오심’이라기보다는 ‘현존하심’, ‘오심’인 것이지요. 물론 지금 사용하는 ‘재림’이라는 단어가 이미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는 없겠습니다. 다만 재림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마치 예수님이 부활 후에 ‘안 계시다가’ 언젠가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라고 단순히 생각해서, 파루시아에 담긴 깊은 뜻을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이 오심은 루카 12,35-48에 암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만, 예수님께서 어떤 ‘시간’에 오실 것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또 루카복음 17장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날에 대해서도 말씀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파루시아는 우리가 사는 이 시간의 연속선상에서 어떤 ‘때’에, 혹은 시간의 마지막 ‘끝’에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교회는 이 ‘때’를 단순히 앉아서 기다린다기보다는 혹은 수동적으로 ‘그때를 당한다.’기 보다는 파루시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이때가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신다.”(마르 13,32) 이 ‘때’를 향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기 위해서는 파루시아의 의미를 더 살펴보아야 합니다. [2023년 7월 16일(가해) 연중 제15주일(농민 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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