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23]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공포인가, 희망인가? 설렘과 희망으로 기다리는, 그리고 매 순간 우리의 삶이 향하는 파루시아에는, 오실 그분이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리라는 약속 또한 포함되어 있습니다. 평가를 받는다는 것은 늘 두려운 일이고, 더욱이 그것이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께서 하시는 ‘최종 심판’이라면 두렵고 떨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심판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행실에 따라, 특히 가장 약한 이들에게 행한 것에 따라 의인과 악인을 가르시고 각각 영원한 상과 벌을 내릴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은 하지만, 우리 중에 감히 ‘나는 영원한 상을 받을 만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러니 최후의 심판은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그냥 모두 ‘해피엔딩’으로 끝나면 안 될까 싶긴 하지만, 그것을 바라기에는 심판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나 사도들의 말씀이 너무나 진지하고 준엄합니다. 파루시아에 대한 희망이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심판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먼저, 심판하러 오시는 분은 예수님 자신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요한 5,22) 이 말씀은 창조에 대한 말씀과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물이 그분 안에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분을 통하여 또 그분을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리고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10 참조) 창조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하여 이뤄졌고,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창조의 시작이요 완성이십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역사 안에서 말씀과 행적, 특히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죽음, 부활 사건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예수님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러니 그분만이 모든 인간을, 인간의 역사를 심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심판자이신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당신의 모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이라는 말은,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하느님을 거슬러, 하느님 없이 살고자 했고, 이것을 우리는 ‘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은 인간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당신 아들의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를 없애시고 당신과 화해시키셨으며, 우리 또한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주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도달해야 할 궁극적 목적이신 것입니다. 따라서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우리를 위해 심판받은 분이시고, 심판자이자 동시에 심판의 준거라고 말합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가 받게 될 심판의 기준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심판은 그분을 따라 사는 이들에게는 그저 두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희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2023년 7월 30일(가해) 연중 제17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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