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읽는 단편 교리] 20세기 사랑의 순교자,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 콜베 신부님은 1894년 1월 폴란드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래 세례명은 라이문도인데, 1907년 소신학교에 입학하고 1910년 꼰벤투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면서 ‘막시밀리아노’라는 수도명을 받았습니다. 이곳에서 중등 교육과 수련을 받고 1911년 9월 첫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12년 12월부터는 로마에서 공부를 해 그레고리안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 학위를, 보나벤투라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17년에는 여섯 명의 동료와 함께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회’라는 모임을 결성하는데, 이 모임은 원죄 없으신 성모님께 자신을 봉헌하고 세계의 복음화를 위해 활동하는 신심 단체로 지금도 전 세계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1918년 4월에 사제품을 받고 1919년 폴란드로 돌아온 신부님은 귀국 후 크라쿠프에 있는 프란치스코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습니다. 이후 1922년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라는 잡지를 발행해 매스 미디어를 통한 사도직을 시작하였습니다. 1927년에는 바르샤바에서 40km 떨어진 지역에 잡지 발행의 중심지가 되는 ‘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을 세우는데, 1939년 당시 발행한 잡지는 100만 부 가량 되었다고 합니다. 1930년 신부님은 일본 나가사키로 건너가 ‘원죄 없으신 성모의 뜰’이라는 수도 마을을 세웠고, 여기서도 성모님과 선교에 관한 소식지 「원죄 없으신 성모 기사」(無原罪の聖母の騎士)를 발행하였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성모 기사」라는 이름으로 매월 발행되고 있습니다. 콜베 신부님은 1936년 ‘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의 총책임자가 되어 폴란드로 귀국하였습니다. 이후 나치의 폭정이 심해지자, 가난한 이들과 유다인들을 ‘원죄 없으신 성모 마을’로 피신시켰고, 1941년에는 ‘자유’라는 기고문을 발표했습니다. 나치는 이 기고문을 문제 삼고 또한 유다인을 도왔다는 이유로 신부님을 체포해 결국 ‘죽음의 수용소’ 아우슈비츠에 가두게 됩니다. 이곳에서 저명한 가톨릭 사제라는 이유로 더 혹독한 처벌을 받았는데, 신부님은 그런 와중에도 “증오는 파괴를 낳을 뿐이나, 사랑은 창조를 낳는다.” 하며 원수마저 사랑할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 말, 한 수감자가 수용소를 탈출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당시 나치는 탈출자 한 명이 나오면 그 벌로 다른 10명을 처형하였는데, 이렇게 처형대상자로 지목된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나에게는 가족과 아이들이 있다.’라며 울부짖었고, 이를 본 콜베 신부님은 그 대신 자신이 죽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래서 신부님은 다른 아홉 사람과 함께 지하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의 처형 방법은 굶겨 죽이는 아사형(餓死刑)이었는데, 신부님은 건강 상태가 매우 나빴음에도 다른 동료들이 모두 죽을 때까지 2주 이상 생존하였고, 결국 독극물 주사를 맞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소 성모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신부님은 성모 승천 대축일 하루 전날, 1941년 8월 14일 하늘나라로 오르셨습니다. 이후 1971년 성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습니다. 내일은 성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신부님의 순교 82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2023년 8월 13일(가해) 연중 제19주일 의정부주보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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