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쉬운 믿을교리 해설 - 아는 만큼 보인다] 230. 교회 시대의 기도 ② (「가톨릭교회 교리서」 2626~2649항)
제대로 기도하려면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로 여겨야 - 고트리히프 벨테 ‘다윗 왕’. 찬양은 내가 기도하는 분께 대한 감사가 깊어지면 드리는 것으로,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다. 교회는 기도의 형태로 찬미와 흠숭, 청원, 전구, 감사, 찬양 기도를 제시합니다. 대화에도 다양한 내용이 있듯이 기도에도 다양한 내용이 존재합니다. 기도할 때 이러한 기도의 형태들을 우리가 미리 정하고 한다기보다는 기도를 하다 보면 그러한 내용들이 나온다고 여겨야 합니다. 대화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더 중요합니다. 내가 누구이고 상대가 누구인지 명확히 인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말을 해주어도 버릇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대화의 내용은 잘 정립된 관계라면 저절로 좋아집니다. 톨스토이가 길을 걷고 있는데 거지가 다가와 도와달라고 했습니다. 톨스토이는 주머니를 뒤져보았으나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 거지를 바라보며 “형제여, 내게 지금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금전이 없으니 용서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거지는 “고맙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형제여’라고 불러준 것이 나에게는 금전을 준 것보다 더 기쁩니다”라며 눈물을 훔쳤습니다. 관계가 먼저이고 그 다음이 대화 내용이고 행동입니다. 마르틴 부버는 자신의 책 「나와 너」에서 인간 관계를 친밀성에 따라 세 단계로 구분하였습니다. 첫 번째가 ‘나와 그것’의 관계입니다. 이해타산적인 만남입니다. 상대를 이용해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청원기도와 감사기도를 해봐야 주님은 들어주시지 않으십니다. 주님을 금송아지처럼 만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위 이야기의 톨스토이처럼 이웃을 형제로 바라보는 ‘나와 너’의 관계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과 이러한 관계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아니면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나와 너’와의 관계가 완전해지려면 모든 이를 ‘형제’로 만들어 준 초월자 하느님을 전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초월자를 부버는 ‘영원한 너’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 영원한 너를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제일 중요한 단어는 그래서 “아버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자녀에게 선물을 줍니다. 이에 우리는 찬미기도를 드립니다. “찬미기도는 하느님 선물에 대한 인간의 응답입니다.”(2626) 마찬가지로 “흠숭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임을 깨달은 인간이 취하는 기본 자세입니다.”(2628) 그리고 부모에게 아무것도 청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청원은 이미 아버지께로 돌아섬을 의미합니다.”(2629) 또한 부모로부터 사랑받는 자녀가 형제를 위해 아무것도 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위해 전구해 주시고 성령님도 우리를 대신해 간구해 주십니다.(2634 참조) 부모에게 감사하지 않는 자녀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바오로 사도도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8)라고 말합니다. 감사가 깊어지면 찬양을 드립니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와 율동을 보여줍니다. 이에 부모는 기뻐합니다. “찬양은 하느님께서 진정 하느님이심을 한결 더 직접적으로 인정하는 기도의 형태입니다.”(2639) 먼저 가슴으로 진정한 자녀로 기도하고 있는지 살핍시다. 그런데 내가 하느님을 진정 아버지로 여기는지는 나의 감정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아기가 엄마 품에 안긴 것처럼 평화로운 마음이라면 무슨 말이든 하고 싶은 말을 하면 됩니다. 그러면 모든 말이 기도가 됩니다. [가톨릭신문, 2023년 8월 20일, 전삼용 노동자 요셉 신부(수원교구 조원동주교좌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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