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32] 죄의 용서를 믿으며 죄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 사회의 각종 범죄가 생각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 중에도 생각보다 자주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중에 ‘중죄’도 있지만, 많은 경우는 일상생활에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미사에 참례할 때마다 우리는 죄를 고백하고, 좀 더 중한 죄에 대해서는 고해성사를 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분명 하느님이 용서하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겠지요? 그런데 무엇이 죄일까요? 십계명을 어기는 것이 포함될 것이고, 일상 생활에서 죄라고 여겨지는 행동도 있습니다. 신학에서는 죄의 본질을 ‘하느님을 거스름’이라고 봅니다. 하느님 안에, 하느님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반대 방향으로 돌아서는 것이지요. ‘하느님께 등을 보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방향과 반대로 움직이는 것, 그것이 곧 죄입니다. 회개로 번역하는 희랍어 ‘메타노이아’에 ‘가던 길의 방향을 바꾼다’는 의미가 포함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자꾸 죄를 짓다 보면, 혹은 같은 죄로 계속 고해성사를 보다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까 고민합니다. 그런데 죄를 전혀 안 짓는 것이 가능할까요? 아마 좀 덜 지을 수는 있겠지만,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의인도 하루에 일곱 번 넘어진다.”(잠언 24,16)고 하니 말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느님은 당신 아드님을 믿음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죄로 넘어질 수도 있고 영적 어두움을 겪을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안 짓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죄를 짓고 넘어지더라도 그리스도와 시선을 마주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넘어지는 것은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후 예수님과 시선을 마주칠 수 있는 것, 그분을 향해 서는 것입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성장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지은 후 하느님을 피해 숨었고,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한 후 혼자 울다 죽습니다. 반면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눈을 마주쳤고 통회했으며,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후 진정한 사도로 거듭납니다. 용서하시는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신뢰한다는 표시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그리고 많은 성인 성녀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짓지 않은 죄에 대해서도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물론 이 말이 ‘마음 놓고 죄를 짓자’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이 용서하시리라는 신앙은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신뢰에서 비롯됩니다. 그리고 이 신앙이 참된 것이라면, 가능하면 하느님을 등지지 않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하느님의 용서를 놓고 ‘마음 놓고 죄를 짓자’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바오로 사도는 따끔하게 훈계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롱당하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뿌린 것을 거두는 법입니다.”(갈라 6,7)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 모든 사람에게, 특히 믿음의 가족들에게 좋은 일을 합시다.”(갈라 6,10) [2023년 10월 22일(가해) 연중 제29주일(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전교 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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