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39] 신앙감각 : ‘어떻게 저걸 알까?’ 종종 “신학을 배운 적도 없는데, 어떻게 저걸 아실까?” 하는 생각이 드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분들은 배움이 많을 수도 적을 수도 있으며, 연세가 많을 수도, 혹은 어릴 수도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이분들이 어떤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으신 적이 없음에도 ‘직관적으로’ 어떤 행동이나 말이 그리스도교 신앙에 부합하거나 혹은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지요.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이러한 직관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데, 그것이 ‘신앙감각(sensus fidei)’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가 조금 낯설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단어는 ‘새로운’ 것은 아니고 사실 매우 오래전부터 신학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왔습니다. 우선 이 말의 의미부터 보겠습니다. “신자들은 올바른 그리스도교 교리와 실천을 파악하고 그에 동의하며, 잘못된 것을 배척하도록 해주는, 복음의 진리에 대한 본능을 지닌다. 이러한 초자연적 본능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친교 안에서 받은 신앙의 은사와 본질적으로 결합된 신앙 감각이라고 불린다.”(교황청 국제신학위원회,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감각》 2항) 신자들이 올바른 그리스도교 신앙에 동의하고 그것을 실천하며, 잘못된 것은 배척하는 본능을 가진다는 주장의 근거는 우리가 세례 때에 성령의 도유를 받는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7), 그리고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요한 16,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감각에 대한 가르침은 세례를 받은 모든 이는 성령의 도유를 받았기 때문에, 무엇이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의 진리이며 무엇이 신앙의 삶인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자들이 신앙감각을 가졌다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리에 대해 저마다 생각하는 ‘모든 것’이 옳다고 봐도 될까요? 16세기에 종교개혁을 할 당시, 루터는 우리가 성령의 도유를 받았고, 따라서 진리에 대해 판단할 수 있기 때문에 교회 교도권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 때문에 루터가 생각하는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함께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전까지 거의 400년 동안 신앙감각에 대한 말을 잘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이 단어가 생소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앙감각은 성령의 선물인데, 그렇다고 어떤 물건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자들이 갖는 본능, 직관, 능력이어서 성장할 수 있는, 다시 말해서 더 예민하게 발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말이지요. 물론 그러한 성장 또한 성령의 선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성령의 움직임에 협력해야 하고요. 우리가 그러지 않을 때, 마치 돌보지 않는 식물이 시들다가 말라 죽을 수도 있듯이, 신앙감각은 왜곡되거나, 점점 흐려질 수도 있고 심지어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러니 신앙감각은 식별이 필요할 뿐 아니라, 성장도 해야 합니다. [2023년 12월 24일(나해) 대림 제4주일 서울주보 4면, 최현순 데레사(서강대학교 전인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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