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부르심, 하느님의 행복! 첫 예비자 교리 때마다 세례를 받게 된 동기를 들어보면, 가족들의 권유와 협박(?), 지인들의 인도, 그리고 본인들의 자발적 의향 등 참으로 다양하다. 그럼에도 공통적인 동기와 이유는 분명히 있다. 예비신자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했다는 사실이다. 다만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이후에도 우리를 향한 하느님 사랑으로의 부르심은 끊임없이 계속해서 이루어진다. 이를테면 한순간에 삶의 무너짐을 겪은 이에게는 위로의 말씀으로,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이 요동치며 괴로워하는 이에게는 희망의 손짓으로, 그리고 크나큰 아픔과 상처로 큰 슬픔에 잠긴 이에게는 사랑의 목소리로 부르신다. 그 부르심의 궁극적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부모의 사랑에서 유비적으로 엿볼 수 있겠다. 부모는 자식의 잘못이 드러나면 그 책임을 본인에게 돌리며 이렇게 말한다. ‘내가 죄가 많아서 그렇다.’ 무슨 죄가 그렇게 많을까? 굳이 답을 하자면, 사랑을 많이 한 죄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지는 법”(토마스만)이 아닌가. 어쩌면 부모는 본인에게 남은 것이라곤 세월의 고된 흔적인 담긴 갈라진 손과 이마의 주름살뿐일지도 모르지만, 자식에게 그토록 좋고 소중한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주고자 한다. 그 답은 당연히 부모로서의 ‘의무감’이 아니라 ‘행복함’일 것이다. 어찌 행복함 없이 자신들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줄 수 있겠는가! 다시, 하느님의 부르심에 관한 물음으로 돌아가자. 하느님은 항상 우리보다 ‘먼저’ 움직이시고 활동하신다. 실제로 그분은 우리에게 먼저 찾아오시어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보여주셨다. 더욱이 이때 그분은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이” 그렇게 가깝고 친밀하게 우리에게 당신 말씀을 건네시며 우리를 부르신다. 왜, 하느님은 그만큼 우리와 만나고 대화하기를 원하시며, 무엇보다 우리와의 사귐을 통해 친교와 일치를 이루기를 바라시기 때문이다(『계시헌장』 2 참조). 우리만 하느님을 뵙고,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며 일치를 이루고 싶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와의 만남-대화-하나 됨을 원하신다. 그러니 설령 하느님으로부터 숨고 도망가고, 떨어져 나간다 하더라도 그분의 부르심은 결코 멈추어질 수 없다. 당신은 늘 제자리에 서 계시니, 우리가 그분께 멀어진 만큼 다시 되돌아오기를 하느님은 처음부터 끝까지 부르신다. 사실 하느님은 여인이 젖먹이를 잊는다 해도 당신이 한번 사랑한 이를 결코 잊지 않고 영원히 기억하시는 분이 아니신가(이사 49,15; 요한 13,1 참조). 사람이 가장 행복할 때는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할 때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하느님은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신”(요한 3,16)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기를(…) 행복하기를 원하신다”(성 필립보 네리). 왜, 그것은 하느님의 행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오늘도’ 나-너-우리를 부르신다. 그러니 “주님의 목소리를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의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사순시기 성무일도 초대송 후렴). [2024년 4월 14일(나해) 부활 제3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