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신학] 그리스도의 질서(창조 신학) 지난 달 신학교 환경 동아리 학생들과 사진 전시회에 다녀왔습니다. 예술과 전시에 대한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작가들의 메시지가 어렵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모든 시각 장치들은 인간의 탐욕스러운 파괴 행위와 환경을 저버린 무관심의 대가를 표현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감상은 전시공간 안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진전에서 본 작품들이 보여준 모습은 환경 파괴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참혹하고 복잡한 여운이 꽤 오래 남았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문제의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왜 지구의 신음은 갈수록 심해지는 것일까? 어쩌면 위기 해결을 위한 방식과 접근 자체에서 아예 맥을 잘못 짚은 것은 아닐까?’ 환경 전문가들은 제멋대로 자연을 개발하는 인간의 욕심이 기후 위기를 가져온 가장 큰 원인이라고 입을 모아 말합니다.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자연을 다스리고 관리하도록 위임받았다는 성경의 내용(창세 1,28; 2,15 참조)이 자연을 도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고 비판하기도 하지요. 인격적인 창조주에 대한 믿음이 인간을 우상시하고 자연을 도외시하는 문화를 만들었으니, 인간과 자연 사이에 위계를 없애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분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창조 신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그리스도교 창조론의 핵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한에 대해 말하기 이전에 모든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이끌고 가실 것이라는 믿음을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하느님을 찬미하여라> 65항 참조) 이러한 ‘신앙적 확신’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오직 인간의 힘으로만 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오만에 빠지거나, 반대로 인간에 대한 적개심이나 비관론적 체념으로 정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전시회를 개최한 작가들이나 사진 속 환경운동가들은 터전을 지키기 위해 사활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는 것도 인간이고 그것을 살리고자 하는 것도 인간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환경에 악영향을 미치는 행동을 할지라도 올바른 인간관이 무너지면 안 될 것입니다. 환경 전문가들은 이제 곧 지구의 기후는 회복 불가능한 위기에 봉착한다고 경고합니다. 반복된 경고는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기도 하고, 무디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생태계의 보존과 쇄신을 이끄시는 하느님께 회심하고 책임감 있게 응답해야 할 것입니다. 온 세상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서는 창조 질서 수호에 힘쓰는 인간의 활동과 협력을 반드시 완성하시고 세상을 회복시키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질서는 언제나 하느님의 주도권 아래에 있을 때 제 목적을 찾아갈 수 있습니다. [2024년 6월 30일(나해) 연중 제13주일(교황 주일) 서울주보 5면, 전인걸 요한 보스코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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