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교리] ‘고통’에 대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참으로 많은 이들이, 아니 (경중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가’ 저마다의 이유로 고해(苦海), ‘고통의 바다’ 속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나 선한 이들이 겪는 고통을 보노라면 큰 슬픔 속에 풀리지 않은 의문을 담아 하느님께 당신의 뜻을 “알려 주십시오”(욥 10,2)하고 외칠 정도이다. 그렇다면 믿는 이들은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고통 앞에서 과연 무엇을 말하고, 기대할 수 있을까? 첫째, 그리스도교는 고통이 ‘왜’ 일어나는가에 대한 속 시원한 대답 대신, 고통을 ‘어떻게’ 맞이해야 하는가에 주목한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이 대표적 예다. 우선 예수님은 아버지께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마태 27,46)라는 고백을 통해 당신이 처한 비참함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셨고, 심지어 수난의 잔을 거두어 달라는 청까지 하신다. 다만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은 아버지 손에 맡김, 곧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였다(마태 26,38-39; 루카 22,42.46 참조). 그렇다면 우리 역시 뜻하지 않은 고통으로 감정이 요동치고, 내 삶이 무너져 내릴 때, 우선적으로 하느님 앞에 마음속 응어리들을 있는 그대로 쏟아내고 풀어내야 하지 않을까. ‘왜, 하필이면, 나-우리(가정)입니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시간과 내용에 상관없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애절한 한탄과 원망 그리고 간절하고 절박한 애원을 하느님께 부르짖어보자. 성경에서도 “고통받으며 기도하는 사람의 모습을 ‘부르짖음’이라는 한 가지 낱말로 표현”(정태현)하고 있지 않은가! 다만 내가 하고 싶은 부르짖음을 다했다면, 이제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면, 그때에는 예수님의 본을 따라 나의 하느님께 믿고, 맡겨야 하지 않을까. 여기서 하느님께 맡김은 자포자기나 체념 등의 수동적 행위가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전능하심과 영원한 사랑을 믿고 내 모든 것을 봉헌하는 능동적 행위이다. 둘째, 고통의 시간 안에서 하느님의 성실함을 기억하는 일이다. 물론 고통이 건네준 무거움으로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할 수 있지만, 그때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느님은 고통 속에 처한 나를 위해 계속해서 당신의 일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이다(예레 1,12; 2베드 3,9 참조). 곧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지만, 늘 조용하시다”(성 아우구스티노). 그렇다면 고통 앞에서 우리의 마음과 시선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주변의 상황-현실을 넘어서서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루카 13,33) 계속되고 있는 하느님의 충실함과 성실함에 고정시켜야 한다. 셋째, 고통을 용기 내어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다. 고통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라고 한다면, “고통을 치료하는 유일한 방법은 냉정하게 정면으로 맞서 멱살을 잡고 그것을 활용하는 길뿐”(브레넌 매닝)인지도 모르겠다. 식물이 자라는 시간이 햇볕이 쨍쨍 내릴 때가 아니라 어둔 밤의 시간이고, 우리 몸의 성장 역시 낮이 아니라 밤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 삶 그리고 믿음도 고통이란 어둠의 터널을 마주하고 지나가면서 조금 더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럼에도’ 고통, 늘 어려운 이야기다. [2024년 7월 14일(나해) 연중 제15주일 전주주보 숲정이 8면, 윤태종 토마스 신부(전주가톨릭신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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